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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장녀는 이제 이별하도록 해요.

결혼과 동시에 새로운 내가 되어야 한다.

by 밝음

K-장녀란, Korea의 첫 글자 ‘K’와 맏딸을 의미하는 ‘장녀’를 합친 신조어다. 가정과 사회, 문화 환경으로 인해 '책임감'이라는 단어를 버릴 수 없었던 사람들. 책임감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그 책임감이 처음부터 자기의 것인 양 당연하게 껴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장녀다.


부모님 세대만큼 혹독하게 '살림 밑천'으로 강요받지는 않았지만, 첫째 딸들의 내면에는 '역할'이라는 것과 함께 세트로 묶여 있는 게 바로 '책임감'이다. 장녀들의 정신 속에 스며들어있는 전통 사상과 가치관은 사랑받기를 스스로 포기하거나 거부하지 않는 이상, 자연스럽게 물려 배울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최근 블로그에서 그런 분을 한 분 봤는데, 자유를 얻고 나쁜 년 딱지를 얻으셨다고) K-장녀들은 그렇게 알아서 하고, 먼저 하고, 잘 참고, 견뎌내고, 책임지고, 해결하고, 그런 것들이 어려서부터 습관처럼 배어있다. 비단 나 하나만을 비춰 말하는 건 아니다. 웬만한 드라마에서도, 에세이에서도, 그리고 내 주변 친구들만 봐도 장녀 특성이 어떤지 우리는 알 수 있다. 그게 만족스럽고, 자기 취향인 듯 살아가는 장녀가 과연 몇이나 될까? 주체적인 선택적 책임감 장녀는 아직 보지 못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기에.


내 주변엔 장녀인 친구들이 80%를 차지한다. (끼리끼리는 역시 과학인가 싶다.) 그녀들은 말한다. “장녀들은 착해 보이지만, 건들면 안 돼. 알고 보면 조용한 크레이지 걸(crazy girl)들이거든.” 잘 참는다고, 참을성이 많다고 그것들이 바람처럼 다 날아간 것이 아니다. 참고, 참은 것들은 차곡차곡 쌓인다. 조용히 자기 내면에 깊이깊이 파묻힌다. 의젓하고 책임감 강한 장녀들. 하지만 그건 오직 '생존'을 위한 전략의 습득이었다. 타고난 품성이나 기질에 의해 의한 게 아니다. 책임감 있는 행동이 습관처럼 당연했지만, 당연하다고 당사자에게 자연스럽고 편한 것은 아니었다. 결국 '애'를 써야 가능한 일들이다.




힘든 거 싫어함. 도움받길 원함. 마음이 여림.

꽤 우유부단함.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애매모호할 때 많음.

대체 적으로 그냥 좋은 게 좋다는 생각을 하고 삼.


이게 내가 생각하는 나의 천성이다. 비난이 무서워 칭찬을 택하고, 갈등이 싫어 참기를 택하다 보니 본성을 죽여야 했다. 어느새 나는 꼼꼼하고 야무지고 자기 할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 책임감 많은 큰딸로 자라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알아서 책임감을 키워가던 내 성격은 열 네 살에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더 강화되었다. 아빠는 환갑 넘어 하늘나라 가실 때까지 할머니가 차려주는 밥상을 받아먹는 것이 당연한, 전형적인 가부장 제도의 남성이셨다. 모든 책임감은 딸들에게 넘겨주고선.


결혼 전까지는 그 책임감이 당연해서 문제가 될 줄 몰랐다. 결혼하고 나면 이제 몸도 마음도 좀 편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내 편이 생기는 일이었고 백지장이라도 맞들 배우자라는 든든한 의지처가 생겼기에 편해지는 걸 수순으로 여겼다. 함께 발맞춰 즐겁게 살아가기만 하면 행복이라는 선물이 내 눈앞에 쿵! 하고 떨어질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내 가정이라는 것이 생기면 내가 딸로서 해온 역할보다 제곱의 제곱으로 책임져야 할 일들이 생겼다. 그것을 나는 몰랐다.


현실 직시하지 못하고 달콤한 꿈만 꾸고 예식장으로 걸어간 것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들을 고민하고, 결정하고, 진행하고, 책임진다는 것. 독립과 자유 뒤편에는 거대한 책임이라는 녀석이 기대어 웃고 있다는 사실을 결혼해서 알게 되었다.

소중한 내 가정. 열심히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해야 할 일은 넘치고, 처리해야 할 일이 한도 끝도 없었다. 사소한 것부터 큰 일까지 일과 일의 연속이었다. 구멍가게 장사가 힘들어 도망쳤더니, 야근을 밥 먹듯 하는 대기업에 입사한 기분이었다.


나는 장녀, 남편은 외동아들.

친정 부모님은 방임형, 시댁 부모님은 통제형.


원가족의 가정환경으로 인한 우리 두 사람의 성격적 특성은 결혼 후 더욱 두드러졌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도 가정을 통솔해야 하는 게 나라고 나에게 스스로 강요하고 살았다. 모든 것을 내가 신경 쓰고 책임져야 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몹쓸 책임감 녀석 때문에. 내가 나서서 해결하고 챙기는 게 습관이었고, 항상 먼저 시작하는 사람이 되었다. 맞춰주고 따르는 게 편한 남편보다 내가 하는 게 훨씬 빠르니 또 내가 하게 되고, 그게 반복이 되고 일상이 되니 결국 모든 짐은 내 위에 있었다.


너무너무 힘들었다. 아이를 낳고 육아를 시작하면서는 몸도 머리도 마음도 쉴 틈이 없었다. 맞벌이가 아니라 외벌이었기에 더욱더 내가 대부분 해결하는 게 자연스럽고 맞다고 여겼다. 집안에 필요한 모든물건들, 제사 생신 같은 행사들, 애들 발달마다 해야 할 일들, 교육 부분까지 모든 고민은 내 머리 안에만 있었다.

가정적인 남편이고 많은 걸 함께 해주었지만, 알고 보니 그건 시간과 에너지의 투입 부분에서의 일이었다. 뭘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계획하고, 고민하고, 알아보고, 선택하는 것들. 진짜 힘들일은 그런 것들이었다. 결혼 5년 차쯤에는 친정아버지가 아프셔서 모시고 살기 시작했다. 막 태어난 막내와 아빠를 동시에 돌보면서 몸이 축났다. 2년을 채우지 못하고 아빠가 돌아가시면서 슬픔으로 내 몸과 마음은 더욱 피폐해졌다. 내 마음이 힘든 이유는 모두 이러한 상황 때문이고 남편의 성향 때문이라고 여겼다. 왜 나 혼자서만 이렇게 힘드냐고 원망하고 소리를 질러도 그날뿐이었다.




결혼 10년 차쯤 정신을 차렸다. 행복하지 않은 나 자신을 발견했다. 겉으로 봐서 아무 문제가 없는 상황인데도 불행했다. 힘들어도 처음부터 다시 돌아가야 했다. 모든 걸 내려놓고,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택해야 했다. 오래 걸려도, 귀찮고 힘들어도, 같이 하는 방법을 만들어 가야 했다. 나 혼자가 아니라 남편과 책임과 결정권을 나누는 방법을 다시 세워가야 했다.


그러면서 그제야 서서히 나 자신이 보였다. 책임감에 갇혀 허덕거리며 사느라 행복은 누리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나. 내가 책임지고 결정하는 삶을 살아내느라. 내 생각과 결정이 옳다고 어느새 커다란 아집을 부풀리며 살아온 나. 그러면서 알게 모르게 남편을 무시하고 답답해하며 사랑하는 사람에게 알게 모르게 상처를 줬다는 사실도 아주 뒤늦게 알았다. 하지만 가장 미안했던 건 바로 나 자신에게였다.

살아내야 한다는 생각에 매일 채찍질하며 해야 할 일들만 던져주고 좋은 것, 아름다운 것, 행복한 것들은 나 자신에게 안겨주지 못하고 살았다. 그런 나에게 미안했다.


그때부터 조금씩 K-장녀와 이별했다. 내 행복을 내 인생의 최전선에 두었다. 돌아가도 되고, 천천히 가도 되었다. 제일 중요한 건 나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들지 않는 것이었다. 돌아보니 세상에 해야 할 일이라는 건 없었다. 땅도 일구고 잡초도 뽑고 하며 정원을 가꾸는 그것 자체가 삶이지 많은 꽃과 나무를 빨리 심는 게 잘 사는 삶이 아니었다.


결혼이란, 하나의 꽃을 심더라도 함께 마음을 다해 서로 도와주고, 아껴주고, 그렇게 살펴 가며 심는 것이었다. 중요한 건 꽃과 나무가 아니라 그것을 심는 우리들이었다. 더 행복하기 위해서 결혼했다. 행복 하려고 결혼했다. 엄마라는 자리와 내 가정이라는 것으로 인한 커다란 책임감 때문에 행복이라는 단어를 곁에 두지 못한다면 애초에 결혼하게 된 중요한 이유는 사라져 버린다. 나와 남편, 우리 가족과 함께 행복함을 누리며 사는 것. 이젠 그것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 책임감이 되었다. K-장녀와 아름다운 이별 후, 나는 장녀가 아닌, 그냥 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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