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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정 되찾기 독립운동

가정의 중심을 잡는 데에 늦은 때란 없다.

by 밝음

결혼 8년 차가 넘어가면서 나와 남편은 지칠 대로 지친 상황이었다. 육체적으로도 힘들고 정신적으로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마음이 힘들었다. '결혼'이라는 새로운 삶으로의 문을 지나며 우선으로 해야 할 일은 남편과 내가 서로 알아가고 이해하며 사는 일이었다. 서로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함께 사는 건 쉬운 문제가 아니다. 아무리 연애를 길게 했어도 가족이 되기 위한 노력은 다른 문제다. 우리를 위해 해야 할 숙제를 둔 채 시댁이라는 큰 산을 먼저 옮기려고 애썼으니 행복한 결혼 생활이 될 리 없었다. 노력의 방향이 잘못되고 서로에 대한 기대와 요구가 늘어가면서 힘들었다. 거기다가 육체적 정신적으로 지칠 수밖에 없는 육아라는 관문이 합쳐지면서 부부의 어려움은 배로 늘어났다.


아직 팀플레이가 완벽하지 않은 부부기에 역경을 헤쳐 나가면서도 보람보다는 힘듦이 더 많이 느껴졌다. 하지만 오히려 그 고난과 역경이 한마음 한뜻으로 나아가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 주었고, 그러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에게 물들어가는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 조화를 만들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각자도생'이 아니라 '함께 생존'을 위한 전투력을 상승시키면서 우리는 성숙의 과정들을 만났다. 바닷가 조약돌처럼 서로에게 깎여가는 인고의 시간이 있었지만, 어느덧 햇살에 반짝이는 아름다움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


서로 다른 우리가 맞춰 살아야 하는 결혼도. 나도 덜 컸는데 애를 키워야 하는 육아도 모두 힘들었지만,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하는 부분은 여전히 부모님 그늘에서 독립하지 못한 우리였다. 부모님의 뜻과 다른 우리 뜻을 펼쳐내는 것을 두려워했고, 한 가정의 책임자로서 우리 가정을 지켜내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출가외인 임에도 여전히 슬하의 통제를 받으며 이런저런 지시와 조언 아래에서 살아가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다.


부모님을 우리가 바꿀 수는 없다. 그것부터 수용해야 한다. 부모님이 언젠가 바뀌기를 바랐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마음이었는지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알고 보면 부모님 때문에 힘든 게 아니라 아직도 당당하게 내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거기에 휘둘리는 우리 스스로 때문에 힘들었다. 남편과 나의 팀플레이 정신이 상승하면서 우리는 철저히 깨달았다. 지금이라도 '독립'을 해야 함을.


정신적, 정서적으로 독립해야 했다. 우리의 모습으로 보여주어야 했다. 이미 출가한 별개의 가족임을 어머님이 받아들이도록 해야 했다. 더 이상 나라 뺏긴 국민처럼, 내 가정을 침범당 한 채 살아갈 수는 없었다. 우리는 우리 가정을 되찾기 위한 독립 투사가 되기로 했다.




일단 나부터 정신을 차려야 했다. 착한 며느리 코스프레를 집어치우고 나답게 살기를 결심했다. 예전 같았으면 내가 하고 싶지 않더라도 어머님의 기대 에너지가 느껴지면 맞춰드리려고 애썼을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마음 없는 억지스러운 행동은 최대한 하지 않았다. 정작 본인 아드님은 듣지도 않는 어머님의 시시콜콜한 세상 푸념, 남 까 내리기 대화에 더 이상 장단을 맞춰드리지 않았다. 본인 쓰기는 싫고 버리기는 아까운 물건을 줄 때마다 예의상 주시는 건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이젠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집어치웠다. 덥석덥석 받아오던 모습에서 '이건 제가 가져가도 안 쓸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모습으로 바꿔갔다. 애들 머리가 너무 기니 어쩌니 하는 소리에도 그냥 '네~.' 하며 묵묵하게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어차피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니까.

모든 선택은 우리가 해야 했었다. 우리는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 효도의 정의를 잘못 설정하고 있었다. 어른들에게 맞춰드리는 것.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이나 부름을 무조건 따르는 것. 그런 것들이 효라고 생각했다. 거역이라는 단어까지는 좀 그렇지만, 시댁의 말을 불응한다는 건 대한민국 며느리의 간담(肝膽)으로는 다소 힘든 액션이었다. 그런데 그건 효도가 아니었다. 그렇게 하는 게 좋은 자식, 좋은 며느리가 되는 게 아니었다. 정말 좋은 가족이 되려면 경계가 명확해야 하고, 한 방향이 아닌 양방향 배려와 존중이 깃들어야 했다. 나이와 역할이라는 것에 메여 우리는 함께 노력하는 것을 하지 못했다. 진정한 가족을 이루기 위한 행보가 아닌, 각자의 입장만 공고 해지는 행보를 한 것이었다. 그렇게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는 '무조건 네! 며느리'를 버리고 '나다운 며느리'로 다시 태어났다.


그다음 할 일은 자식 역할 제자리 돌려놓기였다. 결혼하고 오랜 시간 동안 남편이 해야 할 자식 자리를 내가 꿰차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남편이 하고 싶지 않은 효도 수준을 남편은 나 때문에 감당하고 있었다. 자주 찾아뵙고, 주기가 되면 안부 전화 드리고(옆 동네 사시는데), 가족 행사는 섭섭하지 않으시게 챙기고, 함께 여행 가는 행복한 가정 만들어 가기 프로젝트도 시행하고, 등등 여하튼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었다. 하지만 그건 모두 어쭙잖은 나의 이상 놀이었다. 우리답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가족 다 같이 찾아뵙는 횟수를 줄였다. 대신 어머님이 사시는 동네에 회사가 있는 신랑이 자주 오가면서 어머님 댁에 들렀다. 아드님을 자주 뵈시면 오히려 덜 적적하실 거로 생각했다. 그리고 사실 자식 도리는 남 자식이 아닌 제 자식이 해야 맞는 거니까. 의식적인 안부 전화도 내가 아닌 남편이 직접 드리도록 했다.


대신 나는 정말 마음이 날 때만 드렸다. 형식적인 게 아니라 정말 가족으로 식사는 하셨는지 뭐 하시는지 궁금할 때 그렇게 했다. 남편도 이게 맞는 것 같다며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남편도 꽤 노력하며 어머님 근황이나 식사 유무를 묻는 등 다시 아들의 역할을 찾는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점점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했다. 대한 독립 만세!! 우리 독립 만세!!




시기가 조금 늦었지만, 누군가의 기대가 아닌 우리 스스로 선택하고 그려가는 가정이 되기 시작했다. 만들어내는 모습이 아닌 우리다운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차곡히 쌓아가는 결혼 생활이 되어갔다. 많은 사람이 상견례 때 이미 애써서 꾸민 모습을 보여준다. 잘 보이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노력을 하곤 한다. 결혼은 당사자 두 사람이 함께 만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연애와 다르게 집안과 집안이 서로 큰 가족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회적인 제도, 분위기와 전통 사상에 의해서 본의 아니게 따라야 할 것 같은 일들에 애쓰는 시간이 늘어가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되다 보면 정작 결혼 당사자인 '우리'는 점점 사라져 간다. 결혼의 주체는 우리라는 것을 결혼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잊어버렸다.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우리는 내 가정을 제대로 세워나갈 수 없었다.


학창 시절과 직장생활을 거치며 늘 빈틈없이 최고가 되어야 한다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배워온 우리는 결국 결혼에서도 그렇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무의식적으로 반응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잘할 수도 없다. 잘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냥 천천히 해 나가면 된다. 나다운 가정을 잃었던 우리의 과거가 마음 아프긴 해도, 중요한 건 되찾았다는 사실이다. 지금 잘 사는 게 중요한 것이다. 잃었던 경험이 있는 내 가정이었기에 우리 가정이 더욱 소중해졌다. 잃었던 경험이 있는 나라였기에 우리나라가 더 소중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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