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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상견례

가족끼리의 경계는 존중되어야 한다.

by 밝음

결혼한 지 이 년 정도 지났을 때 또 어머님의 호출이 있었다.


“엄마 결혼할 거다.”


사별하고 혼자 계시는 분을 지인에게 소개받았는데, 마음이 잘 맞으셨는지 몇 번의 만남 끝에 재혼 하기로 하셨다고 했다. 이혼하셨어도 남자 친구는 늘 있으셨던지라 누구를 만나시는 건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결혼까지 하신다는 말에 당황했다. 그래도 진심으로 축하드렸다. 우리에게 좋은 일이 생긴 거로 생각했다. 어머님도 노후에 조금 더 행복한 날을 보내실 수 있을 것 같았고 우리에게만 쏠린 관심을 나눌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더불어 좋은 일이라면, 어머님이 결혼하시면 바로 옆 동네였던 시댁이 물리적으로 멀어진다는 사실이었다. 이젠 혼자가 아니신 것에 덜 신경 쓰일 것 같다는 안도감도 컸다. 새 시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는 상관없이 그저 좋은 소식이라고 여겼다.




첫 대면의 날. 새 시아버지의 아들 내외와 어머니와 우리. 이렇게 여섯의 어색한 식사 자리가 펼쳐졌다. 말 그대로 어머니의 상견례. 결혼하고 이런 경험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인생은 역시 예측할 수 없다. 그래도 새로운 가족이 생긴다는 것이 감사하고 기뻤다. 늘 행복한 가정과 가족관계를 꿈꾸는 나였기에 이제야 드디어 그런 날이 오는 건가 하는 들뜬 마음에 진심으로 상견례 자리에 임했다.


아버님께 손 글씨로 정성껏 눌러쓴 환영 편지와 작은 꽃다발도 함께 드렸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는 말도 있듯이 나는 시아버지가 생기는 게 좋았다. 사랑을 받으려는 목적은 없지만 시어머님이라는 뭔가 적대적인 관계와는 좀 다른 관계가 생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님 자식은 멀리 나가서 일하는 직업이라 늘 혼자 생활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 식구들의 존재와 만남이 아버님의 여생에도 기쁨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따로 결혼식은 없이 혼인신고만 하시고 합가하셨다. 주말이면 시댁에 가서 손자의 재롱도 보여드리며 조금씩 가족이 되려고 노력했다. 북적북적 사람 사는 분위기를 줄 수 있는 우리의 역할이 한동안 기쁨이었다. 특히 명절에는 더욱 좋았다. 아버님 댁이 익숙한 것도 아니고 수다스럽게 사담하는 성격도 아니셔서 편하게 지내진 못했지만, 그래도 함께 하는 시간이 좋았다.




그렇게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어느 날 어머니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오셨다. 시아버님이 대장암 말기라는 소식이었다. 이 기구한 운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랐다. 아버님의 삶도 마음이 아팠고, 이제야 좋은 날 보내나 싶었는데 또다시 불행이 찾아온 어머님의 삶은 더 마음이 아팠다. 갑작스러운 암 선고를 받으시고 치료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아버님의 얼굴엔 갈수록 남은 시간이 없다는 표식이 늘었다. 태어났다면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운명의 시간이지만, 왜 하필 이 타이밍에 찾아온 건지 하늘이 또 원망스러웠다.


재혼 후 아버님의 첫 생신날이었다. 아픈 사람 생일은 챙기는 게 아니라는 말을 들어왔지만, 사람의 마음은 의례를 넘어서는 것이다. 어머님께 전화해 아버님 생신상을 내가 차리겠다고 말씀드렸다. 정성스럽게 상을 차리고 벽에 축하 메시지와 풍선도 달았다. 치료 중이라 많이 드시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즐거운 시간을 선물해 드릴 수 있어서 기뻤다. 아버님은 한 번도 받은 적 없는 며느리의 생신상을 받으실 수 있어서 기뻐하셨고,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아버님의 생신상을 차려드릴 수 있어서 기뻤다.




아버님은 그로부터 겨우 육 개월의 생을 더 누리시고 세상을 떠나셨다. 우리의 인생에 잠시 손님처럼 왔다 가신 아버님. 아버님이 그렇게 떠나버리시고 어머님은 또 혼자가 되셨다. 다시 우리 동네 근처로 이사를 오셨고, 다시 불시방문과 전화 연락이 시작되었다. 나는 이제 힘이 빠졌고, 어머님의 불만족은 늘어갔다. 어느 날부터는 남편에게 내 험담까지 하기 시작하셨다.

"전화 한 통 안 하냐"

"나는 이제 너희 포기했다."

"시집살이도 안 시키면서 살았는데"

"다른 집 며느리들은 어쩌고저쩌고"

나에 대한 불만이 아들과의 싸움으로 번질 때가 잦아졌다. 나는 그 일들을 남편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티를 내지도 못하고 가짜 마음으로 시댁에 의무적으로 방문하기 시작했다. 어김없이 어머니의 불만은 또 시작되었고, 참다못한 남편이 어머니에게 말했다. "수현이가 이것저것 노력도 많이 했고, 솔직히 엄마가 재혼한 건데도 시아버지라고 자기 스스로 생일상도 차리고 얼마나 노력했냐고. 우리도 나름으로 열심히 했는데 도대체 왜 그러는 건데?"

어머님은 도리어 화를 내시며 말씀하셨다.

"그게 뭐라고 유세고, 어? 안 그래도 상 차리라고 수현이한테 시키려고 했었다. 당연히 해야 하는 거지."

십 년의 노력이 수포가 되는 순간이었다. 아무 노력도 하고 싶지 않았다. 왜 애써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뭘 그렇게 잘못 했는지도 몰랐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내가 아무리 애써도 나는 좋은 며느리가 될 수 없었다.

'심판하는 자리'


나에게 시어머니 자리는 늘 그런 자리였다. 고마워하기를 바라서 했던 일들이 아니었음에도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희생이 아니었음에도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나라는 사람에 대한 취급의 문제라고 여겼다. 내가 누구에게 잘하기 위해서 결혼을 한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나도 스트레스받고, 남편도 스트레스받고 우리의 관계도 힘들었다. 우리 결혼은 첫 단추가 한참 잘못 끼워졌고, 나는 틀린 방향으로 최선을 다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 내가 행복 하려고 한 결혼. 내 결혼을 다시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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