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밝음 Apr 14. 2023

전통 있는 유교집안도 아니면서

결혼 후 첫 관광은 친척 집 인사투어.

결혼 후 우리는 꽁냥 거리는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이 집에 우리 둘만 있다는 사실이.

더 이상 부모님의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100% 우리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즐겁고 행복했다.     


서툰 솜씨로 반찬 하는 것도 즐거웠고, 함께 청소하고 빨래하는 것도 소꿉놀이 같이 마냥 재미있었다. 생존을 위해 가족과 함께 더불어 살아왔지만 인간이란 뼛속부터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라는 것을 그때 느낄 수 있었다.     


결혼이라는 건 우리를 철없는 인간에서 의젓한 어른으로 자동업그레이드 시켜주는 프로그램 같았다. 우리의 인격은 미성숙 그대로였지만 결혼의 문을 통과했다는 것만으로 왠지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 의지가 아닌 자동어른이 되면서, 알아서 판단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그리고 어른다운 역할을 해야 할 일들이 잦았다. 나의 내면엔 아직도 나밖에 모르는 어린아이가 살고 있는데 말이다.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 (진짜) 어른들의 세계관에 맞는 언행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내 안에 자동으로 심어졌다. 챙기는 기술, 살피는 기술도 늘어갔다.     


마땅히 해야 하는 것.     

부모님들은 부모님들대로, 우리는 우리들대로.

결혼했으니 마땅히 이런 것들을 해야 된다는 생각이 갑자기 자리 잡았다.     


이를테면, 신혼여행 다녀온 후 예를 차리는 것부터 해서 부모님들께 안부전화를 드리는 것들이다. 주말이면 찾아뵙고 잘 살고 있다는 신고 겸 새로운 가족이 되기 위한 시간적 노력을 의례로 해야 한다. 그런 것에 천천히란 없었다. 나만의 속도 같은 말은 결혼 속에 없었다. 평일엔 각자 직장에서 일을 하고, 주말이면 신혼을 즐길 틈이 생기기도 무섭게 찐어른들과 관계를 해야 했다.     


챙겨야 할 집이 하나도 아니고 '양가' 두 집이다. 하필이면 나는 사별한 홀아비의 딸이었고, 신랑은 이혼한 돌싱녀의 아들이었다. 배우자가 없는 시어머니와 장인어른을 둔 부부는 남들보다 양가에 두 배의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외로운 내 부모의 일부였던 자식이라는 내가 떠나버리면 그분들은 혼자 남겨지기 때문이다.     


죄가 없는 죄인이 된 기분. 하지만 억울해 할 수도 없는 처지.

멀쩡한 성인이심에도 챙겨야 할 것 같은 기분. 하지만 나쁜자식이 될 용기도 없는 처지.     

우린 말 그대로 그런 처지의 부부였다.

행복하면서도 어깨가 무거운 쌍감정을 품에 안고 살아야 했다.     


주말직전 어김없이 어머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왜 아들 두고 늘 나에게 전화를 하셨는지 모르겠다.)     

"OO아! 이번주에 너거 어디 좀 따라가자."     


시댁의 통보란 선택권이 없는 1순위 스케줄이었다. 그냥 나를 따르라면 따를 뿐이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았기에...     


어디를 가자고 하시는 건가 싶었더니 남편의 큰 댁이었다. 남편은 큰 댁에 가기 전부터 어머님과 싸우기 시작했다.     


남편: "아니 거기를 왜 가야되는데?"

어머님: "마마마! 됐다. 그냥 그래하는기다."     


마지못해 따라간 남편의 큰 댁에는 큰아버지 내외와 어머니의 시할머니가 살고 계셨다. 어색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인사를 다니는 게 도리라고 생각해서 그냥 그렇게 착하게 따라다녔다.      


어머님은 이혼하신 지 10년이 넘으셨고, 자신의 남편(신랑의 아버지)은 이혼 후 잠적하셔서 큰댁 식구들도 아버님의 행방을 모르는 상태였다. 나는 사실 남편의 집안사정을 정확하게 다 알지 못했다. 그냥 조금 어렵게 자랐다는 것만 알았지 세세하게 어떤 과거 스토리가 있었는지 몰랐었다. 내가 명절마다 맛있는 차례밥 먹으러 큰 아버지 댁에 갔던 것처럼 그냥 그런 건 줄 알았다. 그래서 남편을 잘 달래서 어머님을 따랐던 것이었다.  

   

남편은 큰 댁에 있는 내내 똥 씹은 표정을 짓고 억지로 앉아있었다. 시할머님도 큰 아버님도 어머님이나 남편이 아닌 나에게 이런저런 말들을 건네셨다. 어머님의 포지션은 그저 ‘얘네들 데리고 온 자’, ‘너희 집 아들의 아들이 결혼해서 보여주는 입장의 자’였다.     


큰 댁 방문 이후로 주말마다 우리는 어머님의 언니들. 즉 남편의 이모님 댁에 투어를 다니기 시작했다. 큰 이모님 댁, 둘째 이모님 댁, 셋째 이모님 댁 모든 친척집들을 일일이 돌며 인사를 다녔다. 거기다 드레스코드는 한복. 어머님 분부대로 새색시, 새신랑답게 한복을 입어야 했다. 그래도 다행히 이모님 한 분은 미국에 살고 계셔서 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 대신 둘째 이모님은 훗날 한국 방문 때 우리 집에 머물면서 숙박을 하셨다.)     

어느 주말 하루, 그렇게 또 우리의 인사 투어는 시작되고 있었다. 어머님은 주소만 찍어주셨고 남편은 네비를 따라갔을 뿐이다. 도착해 보니 산소였다. 누구의 묘냐고 남편에게 물어보니 남편도 모르는 눈치였다.   

  

묘지 앞에 도착해서 돗자리를 깔고 술을 따르며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너거 시할아버지 묘다." (이상하게 늘 나를 화자에 두고 말씀을 하신다.)

"결혼하면 조상들한테 인사하고 그래야 되는 거다.“     


남편의 할아버지이자 자신의 시아버지 산소였다. 그때부터 점점 신랑도 기분이 상하고, 나도 언짢아지기 시작했다. 어머님께 티는 못 내고 억지로 억지로 그렇게 투어를 다니다가 마지막 날 우리는 폭발을 했다. 묘지참배를 끝내고 이미 갔었던 이모님 댁에 가자는 제의를 하셨다. 남편의 기분과 내 마음 상태가 합쳐져서 결국 우린 그 길을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그냥 엄마만 댕기온나 우리는 그냥 갈게"     

함께 갔으면 하시는 기운이 느껴지지만 이번엔 나도 모른 척했다. 그렇게 어머님을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스름한 저녁의 기운과 우리의 저기압이 해서는 안될 만남을 해버렸다.     


차 안에서 우린 서로의 온갖 짜증을 다 내기 시작했다.     


나: "아니, 당신은 보지도 못한 할아버지 산소를 왜 가야 되는 거야?"

남편: "아 몰라 나도"

나: "아니, 평소에도 다녔으면 내가 말을 안 하겠는데 그러지도 않으셨으면서 왜 그러시는 건데?"

남편: "아 모른다니까. 몰라 나도 진짜 왜 저러는지 아 짜증 나 죽겠네"     


감정이 격해져 갓길에 차를 세워두고 싸우다 남편은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내려서 가버렸다.

눈물이 펑펑 났다. 결혼이 이런 거였다니...     


감정을 추스르려 했지만, 주체가 되지 않았다. 전화를 해봐도 남편은 계속 받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차를 몰고 인근 갓길을 찾으러 다녔지만 보이지 않았다. 나도 너무 화가 나서 그냥 차를 몰고 집으로 가버렸다.     

곧 오겠지 싶었던 남편은 새벽 3시가 넘어 도착했다. 당연히 택시를 타고 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남편은 '치기 + 오기'로 5시간을 걸어온 것이다. 대체 누가 잘못을 한 건지, 누구에게 화가 난 건지도 모른 채 싸워댄 처절한 전투. 그것이 우리의 첫 부부싸움이었다.     


그날로 다시 돌아간들 우린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어머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용기가 우리에게 있을까?     


솔직한 마음이 아니라면 없는 용기도 짜내서 행동해야 한다. 실망을 하시더라도 그것이 우리라면 그런 우리를 보이는 것이다. 우린 함께 행복하게 살려고 결혼을 했는데, 부모님 말을 잘 들을수록 자꾸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일들이 벌어진다.


지키고 싶은 것이 우리 사이라면 미움받을 용기를 내어 그것을 선택해야 한다. 대신 기분 상하시지 않게 의견을 내고 마음을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다. 표현하지 않고 속상해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너무 늦게 알았다.     


부모님을 우리가 바꿀 순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뀌어야 한다.     

결혼은 하루 이틀에 끝날 관계가 아니라는 걸 기억하자.

장기전이라는 걸 기억하고, 

이전 05화 형식에 잡혀 먹힌 우리의 사랑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