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철저히 장기전이다.
결혼 후 드디어 꽁냥거리는 신혼생활이 시작되었다. 집에 둘만 있다는 사실이, 더 이상 부모님의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100% 우리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서툰 솜씨로 반찬 하는 것도 즐거웠고, 함께 청소하고 빨래하는 것도 소꿉놀이처럼 재미있었다. 결혼이라는 건 우리를 철없는 인간에서 의젓한 어른으로 자동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프로그램 같았다. 인격은 미성숙 그대로였지만 결혼이라는 문을 통과했다는 것만으로 왠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른의 세상은 곧 책임이었다. 알아서 판단해야 할 일들이 많았고, 어른다운 역할을 해야 할 일들이 잦았다. 내면엔 아직도 나밖에 모르는 어린아이가 살고 있는데 말이다.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 어른의 세계관에 맞는 언행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작동했다. 챙기는 기술, 살피는 기술도 늘어갔다. 결혼한 자식으로서 해야 할 마땅한 임무들이 줄을 섰다.
이를테면, 신혼여행 다녀온 후 예를 차리는 것. 부모님께 안부 전화를 드리는 것 같은 일들 말이다. 주말이면 찾아뵙고 잘살고 있다는 신고 겸 새로운 가족이 되기 위한 시간적 노력을 의례로 해야 했다. 그런 것에 ‘천천히’란 없었다. 평일엔 각자 직장에서 일을 하고, 주말이면 신혼을 즐길 틈이 생기기 무섭게 찐 어른들과 관계해야 했다.
챙겨야 할 집이 하나도 아니고 양가 두 집이다. 하필 나는 사별한 홀아비의 딸이었고, 남편은 이혼녀의 아들이었다. 배우자가 없는 장인어른과 시어머니를 둔 부부는 남들보다 두 배의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외로운 부모의 일부였던 자식이라는 자리가 비어버리면 그분들은 혼자 남겨지기 때문이다. 죄가 없는 죄인이 된 기분, 하지만 억울할 수도 없는 처지. 부모님도 멀쩡한 성인인데 챙겨야 할 것 같은 기분, 하지만 나쁜 자식이 될 용기도 없는 처지. 말 그대로 우린 그런 처지의 부부였다. 신혼생활이 행복했지만, 어깨에 무거운 짐도 함께 지고 살았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이면 어김없이 어머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왜 아들을 두고 늘 나에게 전화하셨는지 모르겠다.)
"이번 주에 너거 어디 좀 따라가자."
시댁의 통보란 선택권이 없는 1순위 스케줄이었다. 그냥 나를 따르라면 따를 뿐이다.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았기에…. 어디를 가자고 하시는 건가 싶었더니 남편의 큰댁이었다.
남편: "아니 거기를 왜 가야 하는데?"
어머님: "마마마! 됐다. 그냥 그래 하는기다."
남편은 가기 전부터 어머님과 싸우기 시작했다. 마지못해 따라간 남편의 큰댁에는 큰아버지 내외와 할머니가 살고 계셨다. 어색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인사를 다니는 게 도리라고 생각해서 착하게 따라다녔다. 어머님은 이혼하신 지 이미 십 년이 넘으셨었다. 더군다나 아버님과 연락을 주고받지도 않았고 이혼 후 잠적하셔서 큰댁 식구들도 아버님의 행방을 모르는 상태였다.
우리 집은 친척들과 사이가 좋았다. 명절이면 함께 차례를 지내고 웃으며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었다. 내가 큰집에 가던 것처럼 그냥 그런 건 줄 알았다. 그래서 남편을 잘 달래서 어머님을 따랐던 것인데 실수였다. 가족마다 불필요한 동행은 처음부터 하지 말아야 했고, 삶의 형태가 다른 것을 존중해야 했다. 남편은 내내 똥 씹은 표정을 짓고 억지로 앉아 있었다. 할머니도 큰 아버님 내외도 조카인 남편이 아닌 나에게 이런저런 말들을 건네셨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머님도 가만히 계셨다. 그저 ‘얘네들 데리고 온 사람’, ‘너희 집 아들의 아들이 결혼해서 보여주는 사람’의 포지션이었다.
남편의 큰댁 방문 이후로 주말마다 친척 집 투어가 시작되었다. 어머님의 언니들. 즉 남편의 이모님 댁에 투어를 다니기 시작했다. 큰이모님 댁, 둘째 이모님 댁, 셋째 이모님 댁 모든 친척 집을 일일이 돌며 인사 다녔다. 거기다 드레스코드는 어머님의 분부대로 한복이었다. 명절도 아닌데 그 짓을 한 거다. 그래도 다행히 이모님 한 분은 미국에 살고 계셔서 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마저도 훗날 한국에 오셨을 때 우리 집을 게스트 하우스로 쓸 수 있도록 모셔야 했지만.
어느 주말 하루, 또 우리의 인사 투어는 시작되고 있었다. 어머님은 주소만 찍어주셨고 남편은 내비게이션을 따라갔다. 도착해 보니 산소였다. 누구의 묘냐고 물어보니 남편도 모르는 눈치였다. 묘지 앞에 도착해서 돗자리를 깔고 술을 따르며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너거 시할아버지 묘다." (이상하게 늘 나를 쳐다보며 말씀하신다.)
"결혼하면 조상들한테 인사하고 그래야 되는 거다.“
남편의 할아버지이자 어머님의 시아버지 산소였다. 그때부터 점점 신랑도 기분이 상하고, 나도 언짢아지기 시작했다. 어머님께 티는 못 내고 억지로 투어를 다니다가 마지막 날 폭발했다. 묘지 참배를 끝내고 또 이모님 댁에 가자고 하시는 거다. 남편도 나도 마음이 불편한 걸 참지 못하고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함께 갔으면 하는 기운이 느껴졌지만, 이번엔 나도 모른 척했다. 어머님을 이모님 댁에 모셔다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스름한 저녁의 기운과 우리의 피곤함, 불편한 감정이 합쳐져 싸움이 시작되었다.
나: "아니, 당신은 보지도 못한 할아버지 산소를 왜 가야 되는 거야?"
남편: "아 몰라 나도"
나: "아니, 평소에도 다녔으면 내가 말을 안 하겠는데 그러지도 않으셨으면서 왜 그러시는 건데?"
남편: "아 모른다니까. 몰라 나도 진짜 왜 저러는지 아 짜증 나 죽겠네"
감정이 격해져 갓길에 차를 세워두고 싸웠다. 남편은 화를 참지 못하고 내려서 어디론가 가 버렸다. 눈물이 펑펑 났다. 결혼이 이런 거였다니. 감정을 추스르려 했지만, 주체가 되지 않았다. 전화를 해봐도 받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차를 몰고 인근에 찾으러 다녔지만 보이지 않았다. 나도 화가 나서 차를 몰고 집으로 가버렸다.
곧 오겠지 싶었던 남편은 새벽 세 시가 되어 도착했다. 당연히 택시를 타고 올 거로 생각했는데, '치기+오기'로 다섯 시간을 걸어온 것이다. 대체 누가 잘못을 한 건지, 누구에게 화가 난 건지도 모른 채 싸워댄 처절한 전투. 그것이 우리의 첫 부부 싸움이었다.
그날로 다시 돌아간들 우린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어머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용기가 우리에게 있을까? 지금 생각해 봐도 어렵다. 하지만 솔직한 마음이 아니라면 없는 용기도 짜내서 행동해야 한다. 실망하시더라도 그것이 우리라면 그런 우리를 보이는 것이다. 우린 함께 행복하게 살려고 결혼했는데, 부모님 말씀을 잘 들을수록 자꾸 우리 사이가 멀어졌다. 지키고 싶은 것이 우리 사이라면 미움받을 용기를 내어 그것을 선택해야 한다. 대신 기분 상하시지 않게 의견을 내고 마음을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다. 표현하지 않고 속상해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너무 늦게 알았다. 우리가 부모님을 바꿀 순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뀌어야 한다. 결혼은 하루 이틀에 끝날 관계가 아니다. 철저한 장기전이다. 그러니 영원히 하지 못할 행동은 처음부터 하지 않는 것이 낫다. 이름있는 유교 집안도 아니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