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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마다 아이스크림 퍼먹는 남자

결혼은 사소한 것의 합이다.

by 밝음

남편과 나는 열일곱 살부터 알고 지냈다. 스물다섯이 되던 해 어쩌다 연인이 되었다. 4년의 연애 끝에 부부가 되었다. 아무리 남자가 없어도 너 같은 놈 만날 일은 없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우주는 보란 듯이 세상에 절대란 없음을 보여주었다. 친구로 오래 알고 지냈고, 짧지 않은 연애를 했던 우리였다. 연애 기간에도 안 만난 날을 손에 꼽을 정도로 매일 만났다. 시간이라는 증거만으로 우리는 우리를 감히 단정했다. 서로를 너무나 잘 안다고 믿고 있었고, 그렇다고 착각했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 얼마나 알지 못했는지 결혼과 동시에 매일 경험했다. 사소한 다름이 나를 괴롭게 했다. 청소하는 스타일, 집에서 쉬는 방식, 내가 모르던 사소한 습관들, 정말 온갖 것들이 다 괴로웠다. 치약 짜는 것 하나 때문에 이혼한다는 말이 있다더니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었다. 별것도 아닌데도 자꾸 부딪히고 단점이 보이는 일이 늘어나니 자꾸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갔다. 저 사람은 그러니까. 저 사람은 어차피 그럴 거니까. 저 사람은 분명히 그랬을 거니까. 이런 생각으로 서로를 낙인찍기 시작했다.




남편은 밤이 되면 자주 작업에 들어갔다. 그 작업은 바로, ‘커다란 투게더 아이스크림 혼자 한 번에 퍼먹기'. 자신의 숨겨진 마음을 파내듯 밥숟가락으로 한 삽 푹 떠서는 시원하고 달달한 아이스크림을 입속 가득 채우고는 행복해했다. 신혼 초에는 그냥 아이스크림을 아주 좋아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몇 년을 그렇게 사는 남편을 보며 한숨이 푹푹 쉬어졌다. 좋아하는 걸 넘은 중독이었다. 매일 아이스크림으로 마음의 허기를 달래는 습관이었다. 알고 보니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던 버릇이란다. 수동적인 남편의 유일한 취미였다. 그걸 결혼해서야 알았다. 나와 데이트 후 헤어지고 집에서 거행된 일이었을 테니 알 턱이 없었다.


더 화가 났던 건 다른 일에는 먼저 제안하거나 주도적으로 행동하는 편이 아닌데, 아이스크림 사 오는 일 만큼은 너무도 적극적인 그의 모습에 속에서 천불이 났다. 먹었으면 뒤처리나 좀 잘하던지. 제대로 안 버리고 대충 던져 놓은 바람에 애들이 아침에 눈 떠서 귀신같이 아이스크림 통을 발견하고 난리를 쳤다. 왜 아빠만 맨날 밤에 먹냐고. 그럴 때마다 남편이 미워졌다. 아니, 싫어졌다. 아이스크림 따위로 남편을 싫어하게 될 줄이야.


결혼해서 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남편은 손톱, 발톱 깎는 일에 진심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열 손톱 다 깎는데 일 분 컷이다. 앉아서 깎는 것도 귀찮아서 쓰레기통 뚜껑 열고 대강 깎는다. 나와 정반대인 남편은 쪼그리고 앉아서 20분을 깎고 다듬고 조각한다. 애들이 어려 할 일이 태산 같은데 그런 일에 오래 에너지를 쏟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나 혼자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뭘 그렇게 사소한 걸로 그러냐고 생각하겠지만, 결혼은 결국 사소한 것들의 합이다. 절대 큰일로 싸우지 않는다. 나와 다르면 그 사소한 일이 크게 다가온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니 10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흘러 있었다. 내게 남은 건 사랑은커녕, 숨 쉬는 신랑을 보며 '넌 왜 콧구멍이 그렇게 작니?'라며 화를 내는 모습뿐이었다. 결국 남편이 숨 쉬는 소리조차 거슬리는 마누라가 된 것이다.

’이건 진짜 아닌데…… 내가 이렇게 살려고 결혼한 건가….‘




정신을 차리고 남편을 다시 보려고 노력했다. '난 그 사람을 모른다.’라는 생각을 배경지에 깔고 모든 것을 처음 보는 것처럼 관찰했다. 사소한 것이라도 좋은 점, 잘해주는 점을 찾으려고 애썼다. 그를 판단하지 않고 그냥 ‘그런 부분이 있구나.’라고 바라보았다. 하지만 습관은 말처럼 바뀌기 쉽지 않았다. 나와 다른 존재와 함께 가정을 꾸려 살아간다는 건 대단한 일이라는 걸 실감했다. 그제야 알았다. 바꾸는 일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일을 해야 한다는 걸. 이해되지 않아서 답답해하거나,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 무시하고 모른 체 하며 살았더니 서로 달라서 불편한 마음만 쌓여갔다. 우리가 해야 할 건 서로 다른 점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각자가 노력할 수 있는 건 노력하고, 받아들일 건 순수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었다.


결혼 기간이 흐르다 보면 관계의 방식이 정형화되고, 일정한 패턴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러다 보면 서로를 이해하려고 하기보다 단정하게 되고, 희망을 품기보다 포기하게 된다. 부부싸움은 늘 돌아서면 뭐 때문에 싸우게 되었는지 모를 사소한 것으로 발발한다. 언젠가 뭐 때문에 다투는 일이 있었다. 그날은 분명히 대화로 잘 풀어보려고 노력 중이었는데 중간에 남편이 이 말을 던졌다. '넌 어차피 또 그럴 거잖아.'


억울해 미칠 뻔했다. 나는 지금을 얘기하고, 잘해보려고 하는데 자꾸 과거를 들먹여댔다. 마음을 열어보려고 하는 마음도 없이 문을 걸어 잠갔다. 몇 년간의 경험과 패턴으로 또 그럴 거야 신념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건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바꾸지 않으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잘살아보겠다는 마음을 갖지 않겠다는 것과도 같다.


그 사람은 매일 변하는데, 그 사람을 바라보는 나의 눈은 변함이 없다. 부부생활이 그렇게 된다면 물이 계속 흐르지 못해서 썩은 물이 되는 것과도 같다. 서로의 존재에 대한 희망으로 오늘은 달라진 그 사람의 아주 사소한 부분을 발견해 주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사소함이 우리의 사랑을 조금씩 갈라놓아서 숨소리조차 듣기 싫은 단계까지 찾아왔지만 결국 사소함으로 다시 사랑을 채워나갔다. 정말 사소한 것들. 내가 누운 방의 불을 꺼주는 손길, 갑자기 비가 오면 우산을 들고 내려와 주는 발걸음, 내가 밥 먹기 전에 당신은 먹었냐며 물어주는 그 마음. 그 사람의 존재가 있기에 감사한 것들이 많았다는 걸 발견해 갔다. 그리고 그것들을 진심으로 느끼고 진심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마음은 조금씩 다시 채워졌다.

사소한 것들로 멀어질 수도 있고 사소한 것들로 가까워질 수도 있는 부부라는 사이. 사소한 감사들, 사소한 고마움들, 소중하게 엮어서 사랑 가득 느끼며 살아가는 오늘을 선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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