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가족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1990년대. 어릴 적 우리 가족은 가족끼리 여행을 많이 다녔다. 솜씨 좋은 엄마는 늘 손수 가족들을 위해 맛있는 도시락을 준비해 주셨다. 사랑이 듬뿍 담긴 도시락을 들고 주말 아침이 되면 다 함께 동네 근처에 있는 산으로 등산을 갔다.
산에서 먹는 도시락은 집에서 먹는 밥과 하늘과 땅 차이다. 같은 음식이지만 다른 맛을 내는 마법을 부린다. 자연의 에너지를 듬뿍 받으면서 좋은 공기와 귀한 눈요기를 누리며 먹는 도시락은 이 세상 어느 뷔페도 부럽지 않은 최고의 메뉴였다.
주말 일찍 산에 가지 못했던 날에는 선선한 저녁 바람이 불 때 바다로 향했다. 광안리에 살았었기 때문에 바다는 늘 우리 가족의 소중한 친구였다. 모래사장에 앉아 보슬보슬한 모래랑 놀기도 하고, 철썩철썩 파도치는 방파제 위에 앉아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드넓은 바다를 보며 가족들과 먹던 회 맛은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매해 여름방학에는 장유폭포에 텐트를 치고 야영했다. 우리 가족에겐 주말 = 나들이, 여름 = 여행이라는 공식이 있었다.
중학교 1학년. 엄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내 삶엔 많은 고난과 역경이 찾아왔었다. 온전히 내 편이 되어주고 모든 도움을 주던 엄마가 사라지고 아빠도 회사 일로 해외 파견을 갔었다. 할머니와 함께 지내긴 했지만, 갑자기 인생을 알아서 살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사춘기라고 친구들은 부모님에게 반항을 하기도 했는데, 나는 그럴 사람이 없었다. 내 감정 상태보다 어떻게든 살아내는 게 우선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내가 누리던 가족문화는 아쉽게도 모두 사라졌다. 아빠는 배우자를 잃은 슬픔과 IMF 실직을 겪으며 무너졌고, 괴로운 마음을 술로 학대하며 지냈다. 그래도 나는 그 시절에 행복한 추억과 즐거움을 만들어주신 부모님께 감사한다. 그렇게 힘든 시절을 보내면서도 고난을 버틸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어릴 적 가족들과 즐거웠던 추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듬뿍 사랑받았던 시절, 아무 탈 없이 그저 행복했고 즐거웠던 그 기억을 간직하고 힘들 때마다 조금씩 꺼내어 나를 위로했다.
그런 기억 때문에 결혼한 후 즐거운 가족 추억을 만들기 위해 애썼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가족 안에서 행복한 기억을 가져갈 수 있을까? 뭘 하면 더 즐거운 추억을 남길 수 있을까? 하면서 말이다.
주말이 오기 전 주말을 준비하느라 늘 바빴다. 이번 주에는 어디를 놀러 갈지 항상 고민하고 갈만한 곳을 찾아봤었다. 우리 가족이 더 많은 경험을 하기 바랐고, 더 많은 즐거움을 느끼며 살기 바랐다. 그런데 어느 순간 버거움이 느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늘 나 혼자 가족 일정을 계획하며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포착했다.
‘왜 남편은 우리 가족을 위해서 뭔가 준비하지 않는 거지?’
‘왜 남편은 아이들과 즐거운 추억을 쌓기 위해서 이것저것 찾아보지 않는 거지?’
억울함과 원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 "왜 맨날 나만 찾아보고 나만 결정하는 거야?"
남편: "아니 당신이 늘 알아서 하니까"
나: "나도 노력하는 거야. 계획하는 것도 힘든 스타일인데 가족들을 위해서 이렇게 하려고 하잖아. 그런데 왜 당신은 내가 먼저 뭐 하자고 안 하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보내는 건데?"
남편: ...
신랑은 그냥 진짜 아무 생각이 없었다. 가야 하는 줄도 모르고, 그런 걸 미리 생각해야 한다는 생각도 못 했다. 내가 가자고 하니까 가는 것이었고, 내가 다 하면 다 결정된 그것을 따르며 10년을 살았다.
한참이 지나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는 주말이면 그냥 TV 보고 동네 돌아다니는 게 다였어.'
자라오는 동안 가족끼리 여행을 가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우리 가족과 상대적으로 다른 모습의 시댁이 이해되지 않았다. 우리 집도 먹고살기 바빴던 집은 맞는데 그래도 가족 여가나 문화생활을 중요시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무짝에도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다. 중요한 건 지금의 내 가정이고,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결정하는 게 더 중요하니까.
어쨌든 남편은 그런 가정환경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신이 꾸린 가정에서 그런 일들을 주도적으로 생각하고 계획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던 일이다. 그런데 그 차이가 크다 보니 서로 배워가고 얻어가는 부분도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부딪히는 부분도 많이 생겼다. 생각과 경험의 차이는 마음과 행동의 차이를 만들어내게 되고 결국은 관계의 차이를 만들어냈다.
해본 적 없으니 차근차근 하나씩 해보자는 결정을 하고, 남편도 그때부터 노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평생 그런 삶을 살아오지 않았던 사람이 갑자기 그런 마음을 내기는 힘들었다. 무엇을 찾아보는 것도 적절한 곳을 선택하는 것도 준비하는 것도 모두 어려워했다. 그래서 서툴거나 실패해도 이해했다. 우린 최상의 나들이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가족과 즐거운 추억을 쌓기 위함이 목적이니까.
결혼하고 나면 원가족에서 해왔던 문화를 답습하게 된다. 이미 내 안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선택해서 따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익숙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별다른 사고를 하지 않고 본인조차도 원래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산다. 하지만 그건 우리 집이 그랬던 거지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지금은 배우자와 함께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있다.
명절은 어떻게 보내는지, 생일은 어떤 식으로 챙겨 왔는지. 가족끼리 여행이나 여가생활은 어떻게 했는지. 각자 즐겨왔는지 어떤 날이 되면 모두 모여야 했는지. 어떤 일을 알아서 결정해 왔는지 부모님이 결정하시거나 무조건 함께 의논해야 했는지. 정말 많은 것이 다르다.
서로 다른 사람이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자라다가 자신만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간다. 그것을 잘 조율하고 맞춰야 하는 게 결혼이다. 타국이 불편한 이유도 언어 차이, 문화차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만큼 서로가 다른 방식의 소통을 하고 서로가 다른 형식의 문화를 경험하다가 한 가족이 된다는 건 어찌 보면 같은 한국 사람끼리 결혼한다고 하더라도 외국인과 결혼하는 것과 똑같은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남편의 세계와 나의 세계는 차이가 컸다. 사실 남편과는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만의 문화를 만들어가면 되니까 조금 덜한 문제일 수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이 큰 문제인 건 남편과 나. 내 가족 안에서 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그 문화를 자신의 가정 안에서 현재에도 유지하고 있다. 원가족은 그 문화가 유지되고 있는데 그런 시댁 또는 친정과 우리가 함께 관계를 이루어야 한다는 부분이다. 결국 따라야 할 가망성이 크다. 아무리 출가외인이지만 그 문화를 그대로 따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부모들이 있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여기시는 분들도 있고, 알아서 하라는 자유를 주는 부모님들도 있긴 하다. 하지만 각자 서로 다른 가족문화를 양쪽에 끼고 요구사항이 많거나 함께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행사가 많으면 언젠가는 배우자와의 사이도 탈이 날 수밖에 없다.
바라는 바가 많거나 원가족 내 문화를 당연히 따르기를 요구하는 부모님이 계신다면 그쪽으로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억지로 맞추거나 어른들 말이라 시키는 대로 다 따르다 보면 파국을 맞이하거나 내 안에 골병이 생긴다. 나의 이유나 선택으로 했던 일들이 아니기 때문에 의문과 짜증이 쌓여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 가정의 주체자들로서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그것을 선택한다는 개념을 가져야 부모님의 뜻을 따르더라도 쿨하게 따를 수 있다.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정중히 설명을 전하고 우리 가정의 평화와 자유를 지킬 수도 있다. 결혼하기 전에 미리 그런 부분을 사전에 서로 나누는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서로가 어떤 환경과 문화 속에서 살아왔는지. 무엇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해 오고 살았는지. 무엇을 지향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지. 어떤 가정을 만들고 싶은지 등 대화로 알아가야 한다.
조금 시간을 내고 애정을 내어서 서로 다르고, 달랐다는 것만 알면 서로 이상한 사람이 되는 걸 막을 수 있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당연하게 바라거나 요구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이래왔고, 너는 이래 왔는데 이제 우리 어떻게 살까?”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 가족은 이제 주말마다 놀러 나가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대신 가족과 의논해서 우리의 컨디션과 일정을 고려해서 결정한다. 우리의 기호로, 우리의 방식으로, 우리의 선택으로 만들었기에 의미 있고 보람되고 행복한 게 바로 결혼생활이다. 내 가족 안에서 우리의 가족문화를 점검해 보고 우리만의 지향점을 만들어가 보자.우리 가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