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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있어도 내 말을 듣지 못하는 사람

나를 사랑해야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

by 밝음

남편은 특수기술 보유자다. 그 기술은 바로, '귀가 멀쩡히 달려 있어도 내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기술'이다. 그 기술로 많은 신공들을 펼치는데, 그중에 몇 가지를 소개해 본다.


첫째, 내 말을 듣고도 야무지게 까먹는 기술이다. 연애 때도 그랬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놈의 콩깍지는 참 많은 것들을 가리게 만든다.) 이상한 포인트에서 자꾸 어이없게 화를 내는 나를 발견했다. 자꾸 짜증을 내게 되는 이유를 들여다보다 보니 남편의 그 기술 때문이었다. 하루 이틀은 '그럴 수도 있지' 싶었지만, 수없이 반복되다 보면 아무리 도통한 공자님, 맹자님이라도 어렵지 않을까 한다. 몇 년이 지속되었고, 갈수록 심해졌다. 자꾸 소통에 문제가 생겨났다. 오해가 생기거나 일에 착오가 생겨버리니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여보, 왜 빈손으로 와?"

"아! 깜빡했어. 이제 생각났네."

(장난하냐?, 잊어버렸다고 하면 다냐?)


출산하고 나면 아이 보느라 집에 발이 묶여 있을 때가 많다. 남편과의 손발이 착착 맞아도 힘든 시기다. 아무래도 그때그때 필요한 물건도 많은 시기라 육아용품이나 소모품 등을 남편에게 사 와 달라고 부탁해야 할 경우들이 생겼다. 분명 아침 출근길에 미리 부탁했었다. 일이 바쁘니까 잊을까 봐 중간에 문자로 다시 재차 전달했다. 그런데도 사 오지 않은 것이다. 이유는 늘, 언제나, 한결같이. 깜빡해서.


고의도 아니고 깜빡했다는 사람에게 화를 내자니 쪼잔한 사람이 되는 것 같고, 이해하고 넘어가려고 하니 번거롭게 다시 또 일을 처리해야 하는 상황들이 생겨 힘들었다. (결혼, 출산, 육아가 펼쳐지는 결혼 5년 시기는 에너지가 재산이다.) '이럴 거면 내가 굳이 아침부터 몇 번씩 왜 신경 써서 부탁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뜩이나 체력도 없는 스타일에 에너지도 딸리는 육아헬 기간은 아무 일이 없어도 힘들다. 나의 소중한 에너지를 쓸데없는 곳에 썼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었다. 말하지 않아도 먼저 챙기기를 바라는데 말을 해줘도 챙겨 오지 않으니 손발 맞춰 살기가 힘들었다. 까먹는 건 뭐 취미라고 할 수 있는 정도로 자주 쓰는 기술이었다. 이것 말고 또 다른 기술도 있다.




두 번째, 이걸 부탁했는데 자기 마음대로 저걸 사 오는 기술이다. 알겠다고 대답도 야무지게 해 놓고는 귀신같이 다른 물건을 사 온다. 그건 정말 재주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건지 모르겠다. 엉뚱한 물건을 들고 온 그를 어이없는 듯 쳐다보고 있으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고는 본인은 전혀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듯 말한다.


"이거 아니야?" "이거 맞잖아."


또 그럴 수도 있지 싶은 마음은 들지만, 나는 일반인이지 보살님이 아니다. 이런 일이 수십 번 반복되면 서로 지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물건을 제대로 사 오냐 안 사 오냐가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질과 신뢰의 문제로 이어지게 되기 때문에 진짜 문제가 될 수 있다.


내 말을 귀 기울여 들었으면 이런 일이 없을 텐데...

스스로 신경을 썼더라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기억할 텐데...

자기 일처럼 여기면 책임감을 가지고 알아서 준비할 텐데...

이런 생각이 쌓여가는 것이다.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 남편이 미워지고, 남편은 화내는 내가 미워지고. 우리는 점점 서로의 입장에서 미움을 쌓아갔다. 그때 상대방의 입장에서 한 번만 생각해 주었더라면 더 악화하는 관계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고 더 빨리 다시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기술로 끝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더 심화한 마지막 기술이 있다.




세 번째, 분명히 들었는데 들은 적 없는 것으로 만드는 기술이다.

부탁이나 해야 할 일 까먹는 건 그래도 어느 정도 그러려니 한다. 다른 물건 사 오는 것까지도 그래, 좋다. 내가 이해해 본다. 가장 마음 상하는 게 이 기술이다. 전혀 들은 적도 없는 것처럼 내 이야기가 無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며칠 전 대화를 하면서 이러쿵저러쿵 내가 겪은 일에 관해 이야기했다. 며칠이 지난 후에 다른 대화를 하면서 남편이 그 스토리를 안다는 전제하에 그때 그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듣고 있는 사람 표정이 이상한 것이다. 앞의 내용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전제된 이야기를 모르기 때문에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


그때의 충격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내가 사기꾼이나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이야기한 사람은 있는데 들은 사람이 없는 것이다. 들은 적 없다고 박박 우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싸우다 싸우다 심도 있게 같이 파헤치기 시작했다. 분명히 들었지만, 자신과 관련 없는 내용이다 보니 쓸모없는 정보는 아주 빠르고 쉽게 지워버리는 경우도 있었고, 귀로 듣긴 들었지만 이미 그 자리에서 제대로 듣지 않고 흘려버려서 기억 창고에 아예 넣지 않은 경우였다.


했던 이야기를 하고 또 하고 해야 하는 나의 심정.

그 귀찮음을 떠나 내 이야기가, 나라는 사람이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

배우자에게 애초부터 귀 기울임 받지 못하고 제대로 관심받지 못했다는 느낌.

사소하게 반복되어 온 이 일들은 작은 섭섭함에 끝나지 않고 대판 싸우게 되는 일들이 되기 시작했다.

섭섭함을 넘어 미움이 되고, 미움 덩어리가 커지고 커져 분노로 진화했다. 화도 내보고, 싸움도 하고, 애절하게 부탁까지 했는데도 반복되었다. 하다 하다 나중에는 너무 심해져서 내 기분 나쁜 게 문제가 아니고 뇌에 문제가 있는 것 같으니, 병원에 가보라는 이야기까지 했었으니 그 심각성이 대략 짐작이 될 것이다.




시간이 더 흘러 이 문제는 완화가 되었다. 그때를 돌아보니 우리에겐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가정을 꾸리면서 핑크빛 미래만을 꿈꿨지만, 결혼은 그저 현실이었다. 달콤한 순간보다 어려운 순간과 해야 할 일이 넘치는 삶에 허덕였던 거다. 서로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몰랐고, 서로가 얼마나 애쓰며 살았는지 몰랐다. 왜냐하면 나 스스로 내가 힘든 줄도 모르고 그 시기를 버티며 살아갔기 때문이다.


나를 돌볼 수 있는 시간과 여력이 없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주체적으로 챙기며 살아가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책임감과 역할에 짓눌려 그럴 여지가 없었다. 쳇바퀴처럼 살아가다가도 한 번씩은 내가 나를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살고 있는 모습을 내가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하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우리가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잘살아보겠다고 선택한 결혼생활이 나를 삼켜버려 나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가정과 가족이 소중해서 나라는 사람이 뒷전으로 밀릴 때가 많다. 내가 있어야 내 가족, 내 가정이라는 것도 존재한다. 나의 행복을 위해 선택한 게 결혼인데 나를 갈아 넣어 내가 사라진 그 결혼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사랑하는 그이가 점점 내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다면, 잠깐 멈추어 우리를 돌아보자. 지금 우리 마음에 여유라는 게 존재하나? 서로를 바라보며 그 순간 그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일 마음의 여유가 존재하나? 무엇을 위해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지 오늘도 잊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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