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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셜리shirley Dec 09. 2020

서른살, 호주로 도망가기

-버릴것도, 잃을것도 없었던 서른살에 떠난 호주워홀

2017년, 한국나이로 나는 공식적인 서른이 되었다.

한국에서 여자 나이 서른이라는 건 공식적이지는 않지만 관습과도 다름없는 사회적인 조건이 아무렇지않게 요구되기 시작하는 나이이다. 그 조건에 만족하지 않으면 주변의 오지랍섞인 구설수에 오르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크게 두가지로 나뉘는 이 조건은 결혼or 사회적 지위인데, 나에겐 이 모든게 충족되지 않은채 갑작스러운 서른을 맞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외항사 승무원을 준비하는 승준생이었고, 언제 있을지 모르는 부정기 면접때문에 정규직 취업을 하기도 힘든상황이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면접에 나는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있었고, 이 지긋지긋한 면접을 포기하면 그만이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올해까지만 딱 하고 그만하자, 라는 집착과 오기로 붙잡고 있었던 것 같다.



면접을 보러 유럽을 비롯해 여러나라를 다녀왔지만 실패는 거듭되었다. 그리고 결국 부모님의 공식적인 지원이 끝이났고, 슬슬 내가 승무원 준비를 그만두기를 바랬다. 부모님은 매번 큰돈을 쓰며 외국까지 나가서 면접을 볼 만큼 승무원이 되는게 큰 가치가 있냐며 이제 그만 결혼하거나 안정적인 직장을 잡기를 바랬다. 어디가서 딸이 서른인데 카페에서 알바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창피하다며 나에게 대놓고 푸념하는 엄마의 말은 상처였고, 속상했지만 하고싶은건 죽어도 해야하는 딸 때문에 맘고생하는건 결국 부모님이었던걸 나는 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도 응원받지 못하는 승무원 준비는 그래서 더 고달팠다.


그 당시 나는 카페 정규직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남들처럼 8시간씩 근무하며 4대보험도 들고 휴가도 있는 그런 정규직장. 그런데도 이상하게 주변사람들은 내가 카페에서 일하고 있다고 하면 아~ 카페에서 알바해? 라고 되물어오기 일쑤였다. 내가 알바가 아니라 정규직 직장이라고 얘기해도 이미 그들의 인식에는 카페=알바라는 공식이 자리잡혀 있어서 뭔가 나이서른에 알바하는 나를 동정어린 시선으로 보는게 느껴졌다. 나는 그당시 커피를 만들고 디저트를 만드는일이 재미있었고, 어차피 서비스직 경력을 쌓아야하는거면 카페에서의 경력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이곳 역시 오래일하지 못했던건 사실이었다. 앞서말한 정규직이지만 주변인들에게 인정받지못하는 포지션의 직장이라 받는 따가운 시선들이 버거웠고 , 그와중에도 정규직이었기 때문에 스케줄을 조정해서 면접보러가는 것도 쉽지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꽤나 나쁘지 않았던 연봉과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곳을 퇴사하게 되었고, 그럼 나는 어느곳으로 가야하나, 라고 생각했을때 더이상 한국이 아니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물론 아주 잠깐, 카페에서 계속 일하며 한국에서 자리잡고 싶었던 적은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시작했던 연애가 내 자존감을 높여준다는 착각을 했던 시절. 그 당시 만났던 남자친구는 나를 아껴줬고, 내가 듣고 싶은 말들과 행동들로 사랑받는 느낌이 들게 해줬다.

그것도 사귄지 단 한달동안.


한달뒤 어딘가 모르게 그의 행동이 변했고 연락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나와의 연락은 항상 귀찮아했고, 데이트 역시도 갖은 핑계로 미뤄댔다.

그와 헤어지기 전 마지막 데이트에서 더이상 그는 나를 보고있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에 담긴건 내가 아니었고, 차게 식은 커피처럼 나에 대한 그의 마음 또한 식었다는걸 확신했다. 그리고 얼마안되서 그는 전화로 내게 이별을 통보했다. 그러자고 했다. 그동안 받은 상처들만으로도 나는 이미 만신창이였다.


그렇게 끝날 줄 알았는데 ,얼마 안되서 다른 여자를 만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리고 함께 다니고 있던 교회에서 커플신발을 신고 나란히 나타난 그들의 모습을 본 순간 그가 왜 한달만에 그렇게 변했는지 깨닫고 말았다. 내 자존감은 무너졌고 견딜 수 없이 비참했다. 한달 만에 변한 이유가 다른여자 때문이라니, 이 무슨 수치스런 이별사유인지.


그 당시, 면접에서도 매번 탈락을 거듭하고 있었고, 알바라는 이름으로 사회적으로 약자였던, 정말 아무것도 없었던 나였기에, 이런 보잘것없는 나라도 사랑해주는 그 찰나의 달콤한 순간이 너무나 간절했고 그래서 붙잡고 싶었었다. 내 진심은 완전히 무시당했고, 배신당한 사실은 나를 더더욱 나락으로 빠트렸다.

나는 그 괴로움들에서 꽤나 오랜시간 벗어나기 힘들었다. 그래서 연애는 나에게 결국 사치구나, 앞으로 당분간 결혼이라는 사회적 조건은 더더욱 충족하기 힘들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한국이라면 지긋지긋했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것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그래서 어렴풋이 생각하던 호주워홀이라는 플랜을꺼냈다. 만 서른살까지 신청할수 있는 비자이기 때문에 나에게는 거의 마지막이나 다름없는 카드였다.

하지만 모든걸 제로상태에서 시작하는 워홀이라는 도전은 나에게 꽤나 큰 도전이었고, 워홀이 나의 미래에 대한 어떤것도 약속해주지 않는다는걸 감당해야했다.


이렇듯 고민을 거듭하다가 만 서른이라는 나이가 지나고 나면 가고싶어도 못간다는 사실,그리고 가장 결정적이었던 건 나의 궁극적 ‘행복’이라는 가치를 두고 생각했을때



미래는 불투명할지라도 자유롭게 살수있다면 나는 분명 지금보다 행복해 질수 있을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결국 그렇게 나는 호주워홀비자를 신청하고 승인을 받게되었다.


고민한 시간들이 무색하게 프로세스는 너무나 간결하고 신속했다.

내가 가게 될 도시는 호주 멜버른, 백팩커스 5일예약이 전부였고 짐은 20kg짜리 캐리어가 다였다.

 

나를 응원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가장 가깝게는 부모님의 반대가 생각보다 컸다. 아빠는 몇번이고 나를 불러앉혀서 호주를 꼭가야겠냐고, 가서 무슨일 할거냐고 계속해서 나를 말리고 싶어했다. 나는 한국보다 외국에서 일하는 경험을 쌓는게 훨씬 내 커리어에 도움이 될거라고, 그리고 만 서른살까지는 외항사 승무원을 준비해보고 싶고 그곳에 더 기회가 많기 때문에 가야한다고, 그렇게 설득시키려 노력했지만 여전히 반대는 심했다.




내가 호주워홀을 떠나는 날, 엄마는 공항으로 가는 지하철에 나를 데리러 주는걸로 마지막 인사를 대신했다. 유일하게 나를 배웅해준건 내 동생, 그 마저도 가장 싼티켓으로 사느라 20kg짜리 캐리어가 무게를 초과하자 체크인 카운터 앞에서 짐을 풀어헤치며 필요없는 짐을 버리고 동생에게 나머지 짐을 부탁했던, 참 서글펐던 출국길이었던 것 같다. 출국장으로 들어가고 나서 동생에게 전화를 걸자 훌쩍이며 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홀홀단신으로 그렇게 떠나는 내가 그렇게 안쓰러울수가 없었단다. 나를 걱정해주는 동생의 마음 때문에라도 나는 울지않고 더더욱 힘을 내야했다.


서른의 고달팠던 나는 그렇게 아무것도 없이, 잃을것도 없이,

낯선 땅 호주로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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