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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셜리shirley Jan 13. 2021

30대 워홀러의 험난한 구직의 길

-노동 착취에 대처하는 자세와 내겐 그 어느 것보다 값진 30불의 가치

  드디어 무사히 이사를 마치고, 드디어 호주 멜버른에서도 내 한 몸 누일 수 있는 집이 생겼다.


비록 아파트 방 1개를 2인1실로 써야하는 쉐어의 형태이지만 어쨌든 집이라는 공간이 생겼다는 안정감은 꽤나 컸다. 함께 방을 쉐어하는 룸메는 나와 동갑이었고, 퇴사 후 워홀을 결정해서 온 것까지 비슷했다. 그녀는 간호사로 일하다가 호주에서 간호과정으로 이민 준비를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굉장히 털털한 성격에 붙임성이 좋은 친구라 우리는 금방 친해졌고 곧잘 밤새 수다를 떨다 잠들곤 했다. 게다가 20kg짜리 캐리어에 온 살림살이를 챙겨온 나와는 달리 80kg에 달하는 짐을 가져온 룸메는 필요한 모든 것들이 구비되 있었고, 내 사정을 눈치채고는 드라이기라던지 각종 생활용품들을 나에게 선뜻 빌려주기도 했다.

나는 어딜가나 정말이지 인복이 많았다.      




집을 구했으니 이제는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이력서를 돌리며 열심히 발품을 팔고 있던차에

그중 가장 처음 연락이 온 곳은 시티 서던크로스 역앞에 한인 레스토랑 치킨집이었다.

일단 시티라서 교통이 좋은편이라 출퇴근도 편할거 같아서 일단 트라이얼을 가보기로 했다.


  저녁6시에 출근해서 일을 배워야하는데 출근하자마자 손님들이 몰아치는 바람에 도무지 일을 배울수가 없었고, 제대로 메뉴 숙지도 안된내게 계속 주문을 받고 응대를 하라니 실수가 생길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트라이얼은 내가 알기로 보통 2-3시간 정도면 끝이난다고 들었는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퇴근하라는 소리를 안하는게 이상했다. 이미 10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너무나 많은 손님들 때문에 바빠서 계속해서 서있느라 다리가 너무 아팠고, 저녁도 먹지못해 너무 배고파서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도저히 이건 아니다 싶어 점장에게 혹시 언제까지 일해야 하는거냐고 물어보자 그때서야 겨우 11시에 퇴근하라는 소리를 하는게 아닌가. 그리고 나중에 연락주겠다는 말로 끝. 정말 힘이 탁 풀렸다.


 트라이얼도 엄연히 노동의 한 형태인데 5시간씩이나 일을 시켜놓고 트라이얼비를 제공하지 않는건 익히들은 악덕 한인업자들의 전형적인 횡포였다. 2-3시간정도는 임금없이 일만 시키고 보내는 곳들도 허다하다고 했다.

 바쁜시간에 일부러 트라이얼을 잡아 내 노동력을 이용한거 밖에 안된다는 생각이 들자 어이가 없었다. 나는 일단 시간도 너무 늦은데다 돈으로 실랑이 할 여력이 없었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데 너무나 서러움이 몰려와 눈물이 핑 돌았다. 이 정도의 고생은 각오했지만, 5시간이나 무료봉사를 할 정도로 여유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나는 당장 일자리가 필요했고, 집세와 생활비가 필요했다.


 외국에서 한국인들을 가장 조심하라는 말은 남의 얘기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그들에게 가장 만만한건 돈 없고 가난한 나같은 워홀러였고, 트라이얼이라는 제도를 교묘히 이용해 노동을 착취하는건 정말이지 참을수가 없었다.

아무리 일자리가 급하다지만, 트라이얼부터 이렇게 사람을 부려먹는 이런곳에선 일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졌고, 내 5시간 노동에 대한 댓가는 반드시 받아야 할 거 같았다.




나는 다음날 레스토랑 매니저에게 연락해 트라이얼비 정산을 요구했다. 정확히 5시간을 일했으니 그 당시 시급 15불에 5시간이면 75불. 우리나라 돈으로 6만원 남짓 되는 돈이지만 일자리가 없는 나에겐 그마저도 절박한 돈이었다.

역시나 차일피일 미룰 거 같은 반응이라 조금 강한 어조로 법적으로 얘기를 이어나가자 알겠다며 일주일 내에 입금해 준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예전에 나였더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강한 어조로 요구하는게 내겐 무엇보다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내가 요구하는 건 너무나 당연하고 기본적인 권리였다. 그래서 더더욱 이곳에선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걸 그렇게 배웠던거 같다.

아무도 내 밥그릇을 챙겨주지 않을뿐더러 절대 만만하게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그렇게 첫 번째 트라이얼에 호되게 당하고 난뒤, 다음날 다른 곳에서 트라이얼을 오라는 연락이 왔다.워낙 그전 트라이얼에 데이고 난 후라 걱정이 앞섰지만, 내겐 그런 망설임조차도 사치였다.


두번째 트라이얼을 간 곳은 시티에서 트램으로도 30분정도 떨어져있는 외곽인 리치몬드라는 동네에 있는 한인 레스토랑이었다.

오늘 트라이얼은 2시간만 할 거라고 미리 매니저님이 얘기해 주었고, 나는 그제서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 다행히 트라이얼을 하는 동안 2시간정도는 적당히 바쁜시간이었고, 트라이얼동안 베트남 여자애에게 홀서버 일을 간단히 배우면서 최대한 열심히 하려는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손님 응대하는법, 메뉴 주문받는법, 포스에 입력하고 서빙하는 것, 결제하는 등 정말기본적인 것들 배우자 2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매니저님은 트라이얼이 끝나자마자 2시간동안의 트라이얼비를 봉투에 넣어 주셨고 본사와 연락 후 바로 연락주겠다고 했다. 같은 한인 식당인데도 너무나 다른 분위기라 놀랐고, 이런 분위기라면 정말 여기서 일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첫 트라이얼로 받은 돈은 30불. 내겐 300불보다도 3000불보다도 더 귀했던 나의 첫 wage. 이게 뭐라고, 2만원이 조금 넘는 이 작은 돈이 주는 성취감은 정말이지 이루말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 두 번째 트라이얼 역시 다른의미로 눈물이 날거 같았다.      



그리고 다음날, 정식으로 출근해도 좋다는 연락을 받았다. 드디어 결국 일자리를 구하게 된 것이었다. 워홀을 온지 2주만의 일이었고, 정말 작은 시작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하나씩 작은 것들을 이뤄내가고 있었다.


서른살이라는 나이가 너무 많아서, 일을 구하지 못하면 어쩔까 불안했던 마음들은 눈녹듯 사라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에서 바닥친 자존감들과 패배감들이 하나씩 회복되가는게 느껴졌다. 누구도 내게 잘못됬다고 판단하지 않았고, 값싼 동정심들과 우월감들로 걱정을 가장한 위선에서도 자유로왔다.



5시간동안이나 댓가 없이 노동착취를 당하고 서러움에 엉엉 울며 집으로 돌아왔던 밤을, 당장 다음 주 집세를 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발로 뛰어다니며 일자리를 구했던 그 힘들었던 날들을 버텨내며 받은 첫 임금 30불은 남들에겐 너무나 보잘 것 없는 돈일지 몰라도 내겐 그 어떤 것보다 값진 것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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