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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셜리shirley Dec 21. 2021

어서 와, 수피 비행은 처음이지?

- 외항사 승무원 트레이닝 : 첫 수습 비행 중국 충칭

   SNY, 수피 비행이란 정식 승무원이 되기 전 수습 비행을 의미한다. 이미 트레이닝 과정은 모두 마쳤고, 트레이니들에게는 3번의 수습 비행이 주어진다.

 소위 깍두기 인원으로 비행에 투입되어 실제로 비행하는 선배들에게 일을 배우는 과정인데, 3번의 비행 동안 총 6개의 포지션에 대해 익혀야 하고 사무장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 비행은 랜덤으로 주어졌고 나의 첫 로스터에는 첫 수피 비행으로 중국 충칭 비행이 배정되었다.      




충칭 비행은 밤 8시쯤 쿠알라룸푸르에서 출발해 10시 남짓 충칭에 도착해 바로 승객을 태운 후 새벽 다섯 시 즈음 다시 쿠알라룸푸르로 돌아오는 턴어라운드 비행이었다. 저녁 출발 비행이라 밤을 꼬박 새우는 비행이니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잠을 자야 했지만 첫 비행을 앞두고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정식 비행은 아니지만 유니폼을 입고 비행기를 타는 첫 출근이라 생각하니 긴장과 설렘이 동시에 들었다.

      

보통 비행시간이 8시면 출근도장을 찍어야 하는 건 그보다 1시간 반 전이기 때문에 6시 반 즈음에는 본사에 도착해야 했다. 더군다나 트레이니들에게는 아직 공항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패스가 없기 때문에 입출국관리소로 가서 따로 1일 패스를 발급받아야 했기 때문에 일찍 출근을 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공항으로 가는 택시에서 깨달았다.

나의 시간 배분은 완벽히 틀렸다는 것을.... 정말 서두르지 않으면 지각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엎친데 덮친 격으로 처음 공항에서 본사로 이어져 있는 길이 익숙지 않아 헤매다 헤매다 정말 브리핑 시작 직전에 본사를 도착하고 말았다. 출근 브리핑 데스크에서 인사를 하는데 크루 모두들 나를 보는 눈치들이 어딘가 탐탁지 않았다. 트레이니 주제에 시간에 딱 맞춰 왔으니 못마땅하게 볼게 뻔했다. 나는 사무장에게 공항에서 오는 길을 헤매다가 늦었다고 얘기하는데 정말이지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다행히 사무장은 그렇게 까다로운 사람은 아니었고 늦지 않았으니 됐다며 바로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브리핑은 그날의 비행 목적지, 비행시간, 승객수 등등 기본적인 비행 정보들을 공유하고 특이사항들을 전달하며 오늘의 비행에 대한 플랜에 대해 간단히 나누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안전 관련 질문시간이 시작되고 사무장은 내게 기내에서 따로 세이프티 질문을 하겠다고 했다. 망했다... 브리핑 때 차라리 물어보라고.... 내 머릿속에 겨우 남아있는 이 지식들이 날아가기 전에...!

         



그렇게 크루들을 따라 비행기에 도착한 나는 좌우 분간도 못한다는 말을 실감했다. 분명 트레이닝 때 배웠고, 견학을 왔었는데도 비행기의 모든 것이 낯설고 어리둥절했다. 하필이면 그날 내게 주어진 과제는 굉장히 복잡하고 바쁜 포지션인 갤리의 역할을 익히는 것.... 카트 재고 체크는 어떻게 하는지, 기내식 수량 체크는 어떻게 하는지 분명히 배웠는데, 승객들이 탑승하기 전 이 모든 것을 신속하게 해야 하는 이 상황에서 나는 패닉 그 자체였다. 게다가 하필 나를 가르치게 된 선배는 전혀 친절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뭔가를 돕고 싶었는데 시종일관 차가운 얼굴에 말을 걸기조차 무서웠다. 사무장은 일단 승객들 탑승을 어시스트하라고 해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싶었다. 나는 나의 첫 승객들에게 최대한 밝게 웃으며 인사하려고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겠지....     


모든 이륙 준비가 끝나고, 기장의 배려로 비행기 조종석에서 이륙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던 건 내게 잊을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왜냐하면 수피 비행을 하는 트레이니만이 누릴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그마저도 기장이 허락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경험이라 나는 그날 운이 좋았던 거였다.         


숨을 참고 조종석 뒷자리에 앉아 드디어 이륙!

해가지고 어둠이 깔리기 전, 활주로를 달리며 하늘로 뜨며 펼쳐지는 광경에 심장이 두근두근 터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잠깐의 꿈같던 시간이 지나가고, 다시 현실로 복귀하자 비행기는 이제 나의 서바이벌 현장이었다.

 딴에는 열심히 해보려고 적극적으로 일을 도왔지만 일을 배우는 내내 선배에게 혼나고, 새벽이 되자 쏟아지는 잠과 싸워야 했고, 긴장해서 제대로 말을 알아듣지 못하자 내게 화를 내는 진상 손님 때문에 정말이지 정신이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내가 생각한 비행은 이게 아니었는데, 그 모든 환상들이 와장창 깨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 수피 비행에 대해 한마디를 남기라고 한다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수피 비행이란 무조건 영혼까지 탈탈 털리는 비행이라고.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제 겨우 트레이닝을 막 마친 병아리 신입 주니어가 처음부터 잘하는 것도 말도 안 되는 건데, 내겐 너무 하고 싶던 일이라 더 잘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폭풍같이 바쁜 시간들이 지나고, 조용해진 기내에서 잠시 쉬고 있던 중, 기가 죽어 축 쳐져있던 나를 사무장이 불러앉혔다.  알고 보니 사무장은 나와 같은 나이였고, 사무장으로 승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임 남자 퍼서였다. 꼼꼼하고 섬세한 성격의 그는 평가하는 시간에도 나에게 굉장히 많은 질문을 하고 나의 부족한 점들을 지적하길래 또 털리는 시간이겠구나 했는데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다며, 너무 첫날부터 기죽지 말고 앞으로 더 성장해 나가면 된다고 나를 다독여 줬다. 그런가 하면 평가서류에도 꼼꼼하게 피드백을 적어주고 도움이 되는 자료들까지 메일로 보내주는 그는 정말 친절한 사람이었다. 첫 SNY를 치르며 멘탈이 나가 있던 나를 알아주고 진심으로 나를 생각해주는 마음이 느껴졌다. 내가 앞으로 선배, 리더가 된다면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의 우당탕탕 첫 수피 비행은 우여곡절끝에 무사히 끝이 났다. 새벽 즈음 퇴근 후 녹초가 되어 집에 와서 그대로 쓰러졌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한 비행의 이상과 현실은 너무나 달랐지만, 언제나 내겐 고난과 역경 가운데도 나를 돕는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감사했다.

 오늘은 비록 실수투성이였을 지라도 앞으로 차근차근 나아지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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