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만의 아지트가 필요해!
아이가 어릴 때는 엄마의 손이 많이 필요하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엄마가 뭐든 다 해줘야 한다. 하나의 생명을 인간으로 키워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님을 실감하게 된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엄마는 몇 년의 시간을 인내로 견디며 희생하게 된다. 아빠가 함께 육아하는 집이 많아졌지만, 아직도 엄마가 육아를 독점하는 집이 많다.
내가 낳은 아이지만, 25시간 함께 있다 보면 참으로 인간답지 않은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내가 엄마인데, 이 정도도 참지 못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의 민낯을 드러내고야 만다. 엄마도 인간이기에 당연히 그럴 수 있다. 그런 일이 반복될 때 문제가 되는 것이다. 반성 없이 계속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엄마와 아이, 모두에게 좋지 않다. 이럴 때는 스스로 엄마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잠깐이나마 엄마가 오롯이 혼자가 되는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아이와 가족이 아닌 '나'를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 당장 무엇을 하고 싶은지, 혹은 무엇을 하고 싶지 않은지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나의 감정을 휘몰아치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엄마가 '나'에 몰입할 수 있도록 혼자 있을 수 있는 장소를 찾아야 한다.
나는 아이가 다섯 살이 되고 나서야 내 상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동안 사랑하는 나의 아이와 가정에 묻혀 사느라, 미처 '나'를 생각하지 못했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나서야 나만의 아지트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가 잠든 새벽에 일어나 내가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생각했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1. 엄마의 아지트 _ 뒷살 둘레길
새벽빛이 스멀스멀 올라올 무렵, 나는 아이가 일어나기 2시간 전에 무거운 몸을 일으킨다. 전날 저녁에 준비해 둔 옷을 입고, 모자를 푹 눌러쓴 후 집을 나선다. 조심히 현관문을 닫고 나서야 한숨과 함께 몸이 가벼워진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마음이 둥둥 떠올라 몸까지 날아갈까 봐 걱정이 된다.
뒷산 둘레길을 걷다 보면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고, 다람쥐인지, 청설모인지는 사람의 기척에 도망가기 바쁘다. 나보다 일찍 나온 어르신들도 보이고, 손잡고 걷는 중년의 부부도 보인다. 나와 비슷한 나이의 여자를 만날 때면 괜히 반가워 말을 걸고 싶어지기도 한다.
가끔 엄마의 기척 소리에 아이가 같이 깰 때가 있다. '나만의 시간에, 나만의 아지트로 가야 하는데, 왜 벌써 깬 거야'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급해진다. 토닥토닥 아이를 다시 재우며 불난 마음을 다스린다. '어린애니까 자다가 엄마를 찾는 게 당연해. 화를 내는 내가 못난 엄마지.'라는 생각을 한다. 다시 자는 날도 있지만, 아이가 쉽게 잠들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산책을 포기하고 나도 함께 잠을 잔다.
대신 아이를 등원시킨 후 바로 둘레길로 달려갔다. 새벽 시간은 아니지만, 푸릇푸릇한 산속은 여전히 싱그럽다. 함께 걷는 사람이 많아졌지만, 사람을 구경하며 내 나름대로 사연을 상상하는 게 재미있다. 새벽에 못 걸었기에 보상심리로 더 열심히, 더 멀리까지 걸어가 본다. 온몸에 땀을 흠뻑 적신 채 집에 돌아와 샤워하면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다. 내 아지트에 다녀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2. 엄마의 아지트 _ 도서관
아이를 등원시킨 후 밀린 집안일을 하느라 정신없이 하루가 지나간다. 집안일은 해도 해도 태가 안 나지만, 안 하면 바로 태가 나서 나를 괴롭힌다. 눈을 감고 살고 싶은 마음도 든다. 그래도 아이 하원 전에 나만의 아지트로 가서 마음을 충전해야 하니까 서둘러 집안일을 마무리한다. 나는 아이를 만나기 전 내 가슴과 마음을 채우기 전에 도서관에 간다.
도서관 열람실에 가면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많다. 젊은 친구들도 많다. 열심히 공부하는 분도 있고, 책을 읽는 분도 있다. 책에 코를 박고 무언가에 열중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변태처럼 희열을 느낀다. 의지가 불타오른다. 나도 뭔가 읽고 싶고, 쓰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그래서 시간이 나면 수시로 도서관에 간다. 나에게는 도서관이 최고의 아지트다.
3. 엄마의 아지트 _ 카페
아이를 키우는 동안 나는 유아를 독점하다시피 했다. 아이 아빠에게도 육아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 주말에도 쉬지 않고 일하는 신랑이 안쓰러운 마음도 든다. 하지만 '아이는 무슨 죄가 있길래 벌을 받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아빠가 있으나 아빠와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아이는 아빠의 손길을, 눈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신랑에게 '일주일에 딱 한 번 일요일 7시에 집에 들어오기'를 부탁했다. 집에 와서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에게는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달라고 했다. 나만의 아지트로 갈 수 있게.
세 번째, 나의 아지트는 집 근처 카페이다. 일요일 저녁 7시만 되면 집 나갈 준비를 하느라 마음이 바쁘다. 아이가 활동하는 시간에 집을 나서는 거라 걱정이 됐지만, 엄마도 살아야 하니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읽을 책과 다이어리를 들고, 후다닥 집을 나섰다. 주말에는 변수가 많아 실상 몇 번 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에게 주말 밤의 외출은 큰 결심이었고, 실행해 본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내가 처음 집을 나설 때는 특별한 목적이나 목표가 있지 않았다. 그냥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할 뿐이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생기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나를 제대로 볼 수 있게 된다.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육아에 지친 내가 보이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방법이 보인다. 특별히 뭔가를 하지 않아도 괜찮다. 커피숍에 앉아 멍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일단 집을 나와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자. 아이와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는 엄마의 편안함과 행복이 우선이다. 엄마만의 아지트에서 오롯이 혼자가 되는 시간을 즐기자. 엄마의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