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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캣브로 Aug 01. 2022

팬티

헛개잡상인, #17

팬티를 거꾸로 입었다. 그리고 깨달음에 조금 더 가까워졌다.


퇴근을 마치고 돌아오니 새 팬티 여러 장이 있었다. 생일을 맞은 나를 위해 아내가 구입한 것이었다. 다음날 새 신을 신고 들떠 학교로 향하는 아이처럼, 새 팬티를 입고 출근을 했다. 새 팬티 좀 입었다고 딱히 들뜨지는 않았다. 그것이 직장인이니까.


이상했다. 그 사이 살이라도 찐 걸까. 분명 나의 사이즈에 맞추어 샀다고 했는데 팬티가 몸에 잘 맞지 않았다. 아내에게 혹시 사이즈가 잘못된 것 아니냐며 볼멘소리를 섞은 메시지를 보냈다. 좋은 마음으로 선물해 준 아내에게 고맙다고 하지는 못할 망정, 나란 남자 미친 남자.


집에 돌아오자마자 불편한 팬티를 벗어던졌다. 이런... 난 하루 종일 팬티를 거꾸로 입고 있었다. 어쩐지 끼더라. 겉과 속을 뒤집어 입은 것은 아니고, 앞과 뒤를 헷갈렸다. 봉제선과 태그를 살피고 다시 입어 보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아내가 골라 주는 옷은 틀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팬티도 상황도 이제야 앞뒤가 맞는다.


난 졸지에 앞뒤가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나의 실수로 아내가 선물해 준 멀쩡한 팬티를 욕보였다. 제대로 확인해 보지도 않고 불만부터 터뜨린 난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놈이기도 했다. 겸연쩍게 웃으며 아내에게 나의 실수를 고했다. 아내는 천 년을 산 신선처럼 껄껄 웃으며 어리석은 나를 용서했다. 아내는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이 아니다.


미안한 마음에 공연히 아내에게 어떤 선물을 받고 싶은지 물었다. 아내의 생일까지는 한 달이나 남았다. 아내는 수제 초콜릿이면 좋겠다고 했다. 얼마 전에 생긴 백화점 상품권이 생각났다. 잘됐다. 이 상황에 상품권으로 선물을 구입하면 돈이 굳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최악이다. 난 내 생각보다 앞뒤도 재는 놈이었다.


나의 앞과 뒤를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나의 밑천이 드러났다. 밑천이 드러나자 깨달음이 찾아왔다. 앞뒤가 다른 주제에 앞뒤도 못 가리고, 순진한 척하면서 속으로 앞뒤를 재는 놈일지언정, 적어도 매일 입는 팬티처럼 겉과 속이 다른 놈이 되지는 말자는 깨달음이다.


그러니까 말이다. 이게 다 아내가 선물로 준 팬티를 거꾸로 입어서 얻은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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