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법 도중 석가가 대중 앞에서 연꽃을 들어 보였을 때, 제자들 중 오직 가섭만이 그 의미를 깨닫고 미소를 지었다. 이는 이심전심의 깨달음, 아니, 이심전심이 아니고서야 얻을 수 없는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말을 통해서만 의사소통하지 않는다. 몸짓과 표정, 억양으로 상대의 의중을 읽기도 하고 반대로 나의 감정을 전달하기도 한다. 이를 비언어적 표현이라고 한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행동을 통해 말과 글 이면에 감추어진 메시지를 읽어내는 것이다. 비언어적 표현이 대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생각보다 높다. 오죽하면 글을 통해 대화할 때도 이모티콘을 사용할까.
비언어적 표현은 집사와 고양이 사이에서는 더욱 중요하다. 과연 집사와 고양이는 말하지 않고도 마음과 감정을 나누고 전할 수 있을까? 혹시라도 냥이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면 어떤 행동을 피하면 좋을까? 이심전심이라 했다. 고양이를 대하는 법도 사람을 대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소통과 교감은 언어를 매개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루비가 간식 캔 하나 따 보라고 마음으로 말하는 중이다.
다정한 집사가 최고의 집사
설레는 첫 만남도, 비열한 모의가 실행되는 순간도 모두 눈빛 교환에서 시작된다. 세상을 담고 있는 듯 크고 영롱한 우리 똥냥이들의 눈을 보고 있으면, 무섭게 반뜩거리는 내 눈도 잠깐은 착해진다(?). 냥이들이 종종 식빵을 구우며 부드러운 눈빛으로(때로는 게슴츠레하게) 집사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는 때가 있는데, 이를 '눈뽀뽀'라고 한다. 적의가 없음을, 그리고 애정과 친밀감을 표현하는 행동이다. 우리도 같은 방식으로 마음을 전할 수 있다. 천천히, 박자감 있게 눈을 깜빡거리는 것이 팁이다. 이내 골골거리거나 평화 속에서 잠이 드는 고양이를 보게 되는 것은 덤이다.
고양이도 이름을 부르면 알아듣는다고 한다. 대개는 하찮은 집사의 부름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을 뿐이다. 귀를 쫑긋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이다. 그래도 가끔은 부르자마자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머리를 비비는 걸 보면 싫지는 않은가 보다. 이 녀석들이 오든 안 오든 나는 상냥한 목소리로 자주 이름을 불러 주는 편이다. 행복해하는 게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 고양이가 집사를 부를 때도 있는데 무시하면 굉장히 서운해한다. 아무리 바빠도 웃는 얼굴로 손을 내어 주고 얼굴도 쓰다듬어 주자.
내가 루비의 이름을 불렀을 때, 루비는 나에게로 와서 개냥이가 되었다. 100번 부르면 99번은 달려온다. 졸려도 온다.
냥이가 싫어하지 않는다면 빗질도 가끔 해 주는 것이 좋다. 그루밍을 해 줄 수는 없으니까. 마사지 효과는 물론 죽은 털을 제거해 헤어볼도 감소시키므로 일석이조다. 겁쟁이 구로도 유일하게 과감해지는 때가 빗질 시간이다. 소파에 누워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하고 있으면, 갑자기 배 위로 올라와 큰 머리를 들이밀며 빗질을 해달라고 애교를 부린다. 가뜩이나 힘도 센 구로의 박치기 공격 때문에 얼굴에 핸드폰을 떨어뜨리는 일도 다반사다. 귀여워서 봐준다. 빗질을 시작하면 온 집 안을 가득 메우는 구로의 골골이가 시작된다.
때로는 침대에서 쉬고 있는 고양이를 팔로 감싸 부드럽게 안아 주거나 팔베개를 해주는 것도 좋다. 실눈을 뜬 채 집사인 것을 확인하고는 곧 새근새근 단잠에 빠질 것이다. 다만 이 변덕쟁이들이 조금이라도 귀찮아한다 싶으면 혼자 쉴 수 있도록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좋은 마음으로 갔다가 냥냥펀치를 한 대 맞고 시무룩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머리 든 거 보이지? 형아, 여기 내 옆에 딱 누워. 팔을 얼굴 밑에 넣어. 그리고 가만히 있어. 쉽지?" 구로와 달리 츠동이는 빗질을 아주 싫어한다. 대신 팔베개를 사랑한다.
이땐 냥아치가 되는 거야!
사람도 고양이도 아무 이유 없이 노려보면 기분이 나빠지는 게 인지상정. 멍하니 눈뽀뽀를 하다 템포를 놓쳐 냥이를 빤히 노려보는 형국이 되면 곤란하다. 도전의 의미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명심해야 한다. 고양이는 상전이고 나는 그들을 모시는 캔따개, 아니 집사이다. 보통은 눈싸움에서 오는 긴장감이 싫어서 얼굴을 파묻고 시선을 회피하거나 자리를 뜨는 녀석들이 대부분이지만, 우리 집 서열 1위 츠동이는 절대 피하지 않는다.
고양이들은 분노하거나 공포감을 느끼면 하악질을 한다. 집사가 고양이 앞에서 하악질을 따라 하는 사례를 찾아봤으나 생각보다 많지는 않았다. 아마 고양이의 공격에 무사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성묘의 경우, 집사의 하악질을 무시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도 하지만, 아기 고양이는 정말로 놀랄 수 있으므로 하지 말아야 한다. 츠동이와 둘이서만 지냈던 초보 집사 시절, 나의 하품 소리를 하악질로 오해한 츠동이가 거친 하악질로 답한 적이 있다.
냥이가 갑자기 "뭘 봐. 이 XX야. 냉장고 위에 있는 고양이 첨 봐? 가서 간식이나 가져와. 시간 없어."라고 말한다고 생각해 보자. 장난으로도 하악질을 따라 하지는 말자.
갑작스러운 큰 동작은 큰소리만큼이나 고양이에게 위협적이다. 고양이가 여성보다 남성을 좋아하지 않는 건 낮고 큰 목소리 탓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큰 덩치와 과감한 동작 때문이기도 하다. 조심성 없는 성격 덕에 고양이들을 많이 놀라게 한 점을 반성한다. 아내에게 계속 혼난 덕분에 지금은 많이 조심스러워졌다. 하지만 상남자 츠동이는 누나들보다 형들(캣브로의 친구들)을 더 좋아한다. 거칠게 잘 놀아주기 때문이다.
집사의 품에 안겨야만 안정을 취하는 고양이들도 더러 있지만, 보통은 개냥이라 하더라도 몸을 들어 안아 올리는 것을 좋아하는 고양이는 별로 없다. 두 다리가 땅에서 떨어지는 것을 불안해하기 때문이다. 우리 집 녀석들도 내려달라고 버둥거리는 편이다. 눈물을 삼키고 무릎냥이와 가슴냥이로 만족하기로 했다. 츠동이는 자존심이 상하는지 특히 동생들 앞에서 안기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츠동이를 안을 때는 팔 하나는 잃을 각오를 한다.
안아야 한다면(안고 싶다면) 엉덩이를 잘 받쳐 주거나 상체를 어깨에 걸칠 수 있도록 하자. 그렇지 않으면 피를 보게 될 것이니.
「취향 저격과 역린 사이」 편이 끝났다. 어쩌다 보니 츠동이를 냥아치의 표본으로 흉만 보다 마무리를 짓게 되는 것 같다. 집에서 태어나 엄마 고양이의 사랑을 홀로 듬뿍 받으며 귀하게 자란 츠동이는, 이른바 ‘스트릿’ 출신이 아니어서 그런지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기는 한다. 나를 밟고 다니는 일은 예사고, 가끔 배 위로 뛰어내리며 암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괜찮다. 더 심해도 된다. 츠동이는 아기 고양이들에게는 상냥하고, 아내가 슬퍼할 때는 옆에 와서 달래주기도 하는 듬직하고 사랑스러운 첫째 동생이니 말이다. 나는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나는 그렇다. 일은 가끔 실수해도 사람 좋은 사람이 좋더라. 일까지 완벽하다면 더할 나위 없지만 개인적으로 ‘일만 잘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편이다. 좋은 집사 역시 마찬가지다. 육묘 지식은 조금 부족할지라도 함께 지내는 고양이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첫 번째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집사의 마음을 고양이도 알아줄 것이다. 손길은 조금 서툴러도 이 집사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지를. 나도 안다. 까칠해 보여도 고양이 동생들도 캣브로를 소중한 가족으로 여기고 있음을. 이심전심의 깨달음에 조금 가까워진 것 같다. 오늘 밤은 뚠뚠한 고양이 동생들의 털에 파묻힌 채로 아내와 함께 공포 영화나 한 편 보고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