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석은 제 할 일을 다 하고 장렬히 전사했다. 장례도 치러 주지 못하고 무심히 붙일 수밖에 없었던 폐기물 신고 스티커가 내 가슴을 후벼 팠다. 그곳에선 안녕하길. 아니, 더 멋진 가구로 태어나길. 구로의 똥스키에 희생당한 우리 집 소파 얘기다. 우리는 녀석에게 이름도 지어 주지 못했다. 아, 제 한 몸 다 바쳐 다른 이의 몸뚱이를 견뎌내야만 했던 인고의 나날. 건방진 고양이의 똥칠 한 방에 가치를 잃어버린 서러운 무명(無名)의 삶. 내 오늘부터 너를 흑구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겠다.
천성이 게으른 나는 누워 있는 걸 좋아한다. 흑구 덕분에 이 보잘것없는 일신의 안녕을 누릴 수 있었다. "구로야, 미안하지도 않니..."
소파에 똥스키 테러를 가한 구로가 원망스러웠다. 있던 것이 없어진 거실은 휑하고 을씨년스러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말 이상하게도 넓어진 거실이... 싫지 않았다...(?) 소파를 치우자 우리 집이 이렇게 넓었나 싶을 정도로 시야가 달라졌다. 자리 한 구석을 불편하게 차지하던 로잉머신도 더 근사해 보이고, 벽에 달린 나무 선반들은 인테리어 소품처럼 느껴졌다. 한마디로 풍경이 달라졌다.
어쩔 수 없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리고... 누울 사람은 누워야지... 넓어진 공간은 포기하기 싫고, 눕고는 싶고, 고민하던 나에게 아내는 부처의 미소 같은 깨달음을 주었다.
“접이식 매트를 사면 되지.”
매트를 쓰지 않을 때는 접어서 벽 한 켠에 세워 둔다. 바닥에서 밥을 먹을 수는 없어서 하얀 테이블도 구매했다. 테이블 앞에 앉아 맥주를 따면 편의점 앞에 있는 기분이 든다.
녀석에게는 미안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접이식 매트를 새 식구로 들였다. 아내는 물론 나도 정리 정돈을 틈틈이 하는 편이고, 한때는 어설프게나마 미니멀리스트의 삶을 지향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고양이를 키우다 보니 반강제적으로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할 수밖에 없게 된 점도 있다. 온갖 곳을 질주하고 오르며, 온갖 것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녀석들 때문에 처참히 깨지고 부서져 버린 소중한 물건들. 조화만 봐도 풀인 줄 알고 일단 입에 넣고 보는 츠동이 때문에 우리는 하다못해 작은 식물조차도 마음 놓고 키우지 못한다.
매트 하나로 완성된 완벽한 한량의 삶
괜찮다. 물건이 없으니 그만큼 청소가 수월했고 적은 노력으로 비교적 깨끗한 집을 유지할 수 있었다. 깨끗한 집을 보자 물건을 더 비우고 싶어졌다. 청소와 정리의 선순환이 일어났다. 새옹지마라 했던가. 스키왕 구로 덕분에 이렇게 우리 집의 공간이 또 넓어졌다.
매트는 생각보다 폭신하다. 접었을 때는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데 펼치고 보니 꽤 커서 눕기도 좋다. 소파에서처럼 뒤척이다 떨어질 일도 없다. 요즘 나는 더욱더 바닥과 한 몸이 되어 가는 중이다. 장점인지 단점인지 모르겠으나, 아내와 내가 살 붙이지 않고도 누울 수 있다. 우리는 집에서도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는 모범 시민이 되었다. 젠장, 올해도 좋은 남편이 되기는 글렀다.
거리 두기 지침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못된 고양이 루비. 난로 때문에 사람도 고양이도 모두 누렁이가 되었다. "루비야, 형아 배는 네 침대가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