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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Oct 08. 2024

불면증 (16)




     2월 말이 되자 졸업식들도 웬만큼 끝나고 현태도 조금 여유가 생겼다. 며칠 후에 있을 입학식을 위해 또 꽃다발을 만들어야 했지만 통상 졸업식만큼 많이 팔리지는 않기 때문에 급할 건 없었다. 현태는 백합 꽃바구니 두 개를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 놓고는 저녁 내내 핸드크림을 손등에 찍어 바르며 앉아 있었다. 한 달 가까이 중노동에 시달린 그의 두 손은 엉망진창이었다. 대패로 밀어도 될 만큼 거칠어진 건 물론이고 전염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울긋불긋했다. 잠결에 긁어 대는 바람에 손톱자국도 여기저기 나있었다. 그는 쉴 새 없이 두 손을 문지르며 쇼윈도 밖의 거리를 내다보았다. 밤거리는 마치 반짝거리는 거품덩어리처럼 섬세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근질근질한 도시의 또 다른 하루가 막 시작되는 참이었다.

     그 때 수철이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자동차 엔진 소리,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 요란한 음악 소리들이 한꺼번에 가게 안으로 밀려들어와 현태는 자신도 모르게 눈쌀을 찌푸렸다.

     “형, 아직 장사 안 끝났어요?”

     “어? 아니, 아직 끝나려면 한 시간 넘게 남았는데.”

     현태는 몸도 피곤하고 또 배도 고프고 해서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참이었지만 무심결에 이렇게 대꾸했다. 특별히 감춰야 하거나 속여야 할 이유 같은 건 전혀 없는데도 그는 틈만 나면 아무런 상관도 이득도 없는 사소한 거짓말들을 하곤 했다. 그저 같은 한 겹에 불과한 외면과 내면 사이에 억지로라도 얇디 얇은 틈을 만들려고 하는 것처럼, 그렇게 언젠가 헐렁해진 외면을 훌렁 벗어버리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에이, 그러지 말고 저하고 한 잔 하러 가요.”

     “술?”

     “형도 꽃다발 만드느라 요새 고생 많았잖아요. 그리고 톡 까놓고 말해서 돈 좀 벌었을 거 아냐? 한 턱 쏘라구요.”

     “많이 벌긴. 요새 꽃값이 얼마나 올랐는데. 꽃값, 포장지 값 다 빼고 나면 크게 남는 것도 없어.”

     “어이구야, 내 앞에서는 그러지 맙시다. 밑지고 장사하는 장사꾼 있답디까? 옆에서 얼핏 보기에도 무지하게 팔려 나가두만.”

     “막상 정산해보면 남는 것도 별로 없다니까.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꽃집은 한 철 장사 잖아. 좀 있으면 파리나 날리면서 손가락이나 빨고 있을 텐데, 뭐. 하여간 알았다, 알았어. 요점은 나보고 술을 사라는 거지?”

     현태는 손을 휘휘 내저으면서도 결국 순순히 수철을 따라 나섰다. 현태가 가게 문을 잠그는 동안 수철은 콧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입맛을 쩍쩍 다셨다. 

     그들은 '사장님과 비서'라는 이름의 단골 술집으로 향했다. 그곳은 좁고 후미진 뒷골목 안쪽에서 침침한 주황색 전등을 켜놓고 장사하는 영세한 주점들 중 하나였다. 주방을 뺀 공간이라고는 5평 남짓이었고 테이블도 고작 두 개 뿐인, 손님이 둘 이상만 오면 아예 문을 걸어 잠그고 진탕 마시는 그런 곳이었다. 접대부도 사장인 마담과 미스 신이라는 여자 단 둘 뿐이었다. 

     마담은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본명을 가르쳐 주지 않은 채 그저 자신을 ‘오마담’이라고만 소개했다. 실제로 성이 오씨인지도 분명치 않았지만 손님들 역시 마담의 본명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굳이 캐묻지 않았다. 사실 44살이라는 오마담의 나이는 화류계에서 버티기에는 부담스러웠다. 긴 생머리에 키도 늘씬하게 크고 얼굴도 반듯해서 젊었을 때는 남자들에게 제법 인기가 있었을 테지만 이제는 진한 화장으로도 나이를 속일 길이 없었다. 특히 습관적으로 주름이 잡히는 이마와 생기를 잃은 턱은 어두운 불빛 아래서도 그녀의 나이를 여실히 드러냈다. 그러나 손님들이 그녀의 나이를 상기하게 되는 것은 단지 시들어가는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소위 ‘연륜’이라고 부를 만한 것으로, 18살 때부터 술집에서 일해 왔다는 그녀는 평소에는 헤프고 영 머리에 든 게 없어 보이다가도 돌연 너희 같은 인간들을 수만 명쯤 보아 왔다는 듯 피곤한 웃음을 지으며 손님들을 바라보곤 했다. 그런 점이 손님들을 거북하게 만들었지만, 또 그런 점이 어딘지 술집 여자다운 퇴폐적인 분위기를 그녀에게 가미해 주었다.  

     마담 밑에서 일하고 있는 ‘미스 신’의 이름은 신경애로, 그녀 역시 술집 아가씨 치고는 나이가 많은  서른한 살이었다. 하지만 아담한 키에 제법 귀여운 이목구비인데다가 옷차림이며 화장도 세련돼서 손님들은 별 불만이 없었다. 오늘만 해도 마담은 양어깨와 치맛단에 요란한 레이스가 달린 파란 원피스 차림에 크고 작은 금색 원반이 치렁치렁 매달린 목걸이를 걸치고 있어서 현태의 눈에조차 조야해 보였지만, 경애는 갈색 체크무늬가 겹겹이 주름 잡힌 짧은 치마와 어깨가 들어나는 하얀색 니트, 조그만 진주가 박힌 귀걸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 마치 데이트라도 나온 처녀처럼 산뜻했다. 거기다 표정에는 여전히 순진하고 영민한 면이 남아 있어서 현태는 그녀를 볼 때마다 이런 여자가 어쩌다가 여기까지 흘러들어오게 됐는지 궁금해지곤 했다. 하지만 실상 술집여자의 외모나 옷차림은 남자들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이 뿌연 주황색 전등 밑에서는 어떤 여자라도 어리고 색스러워 보일테니 말이다. 선명한 오렌지색 피부에 보랏빛이 도는 새까만 눈매와 머릿결, 하얗게 빛나는 이빨은 모든 남자들이 꿈속에서 부둥켜안고자 했던 여자의 원형이 아니겠는가. 

     “아유, 동생들 왔어?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 우리가 얼마나 보고 싶었다고. 자주 좀 들러서 살았는지 죽었는지 안부라도 전해줘야지.” 

     오마담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두 사람의 등을 떠다밀며 호들갑을 떨었다. 건성이긴 하지만 살가운 구석이 있는 오마담의 말투는 수철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죽이 잘 맞았다.

     “아이 참, 누님. 그래서 이렇게 잊지도 않고 또 온 거 아닙니까. 사는 게 그래요. 먹고 사는 건 바쁘죠, 돈은 없죠, 그 동안 여기 오려고 뼈 빠지게 벌었다니까요. 그래도 여기 형님하고 저는 다른 데는 안가요, 꼭 이리로 오지. 우리가 원래 의리 빼면 시체거든. 남자가 딴 건 없어도 의리 하나만큼은 있어야 되는 거 아뇨. 그러니까 여기 안주 좀 맛난 걸로 가져와 봐요. 재료 아낄 생각 말고.”

     “그래그래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봐. 내가 닭 날개 볶음이랑 골뱅이 무침이랑 맛있게 만들어서 가져올 테니까.” 

     “오빠들, 일단 자리에 앉아요.”

     경애가 수철에게 바짝 달라붙으며 말했다. 그녀는 나이가 연상인 현태에게 뿐만 아니라 자신보다 어린 수철에게도 오빠라고 불렀는데 이 바닥에서는 그저 전형적인 일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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