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증 (55)

by 곡도




시장 앞 사거리의 주상복합 건물 2층에 있는 이탈리아 레스토랑 ‘이솔라’는 밝은 황토색으로 칠해진 내부 벽과 하늘색 프릴 장식으로 가장자리가 마감된 흰색 테이블보가 소박하고 산뜻해 보이는 곳이었다. 그들은 출입문과 떨어져 있는 조용한 구석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선영은 크림스파게티를, 현태는 해물리조또를 주문했고 씨푸드레몬샐러드도 한 접시 추가했다.

“여기는 처음 와 봐요. 분위기가 괜찮네요.”

그녀가 레스토랑 내부를 두리번거리면서 즐겁게 말했다. 그리고 메뉴판의 사진들을 들여다보며 이것저것 수다스럽게 평을 늘어놓았다. 레스토랑에 들어설 때만 해도 어색해지면 어쩌나 현태는 내심 염려했었지만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스스럼없는 그녀 덕분에 그 역시 점차 긴장이 풀렸다. 애피타이저로 나온 갈색 호밀빵을 잘게 썰면서 선영이 말했다.

“오늘 가져갔던 국화로 꽃꽂이를 하니까 너무 예쁘더라구요. 아직 국화 철도 아닌데 꽃송이도 크고 향기도 진하던데요. 제가 꽃꽂이를 처음 배울 때만 해도 제 철이 아닌 꽃은 구하기 힘들었는데, 이제 꽃들이 4계절 내내 나오다니 신기하죠.”

“네. 원예 기술이 날로 발전하고 있으니까요.”

“예전에는 꽃 덕분에 계절을 알았는데, 이제는 꽃 덕분에 계절을 잊겠어요.”

“하지만 어찌 보면 좀 잔인한 일이죠.”

“네? 왜요?”

“강제로 꽃을 피우게 하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국화만 해도 여름에는 초저녁부터 실내를 어둡게 만들고 겨울에는 반대로 환하게 불을 밝혀서 억지로 꽃을 피우게 하는 겁니다. 꼭 자백하라고 고문하는 것과 같아요. (그는 강간이라는 단어를 먼저 떠올렸지만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괴롭히고 협박하고 속이는 거예요. 몇 년 전 한겨울에 국화 농원에 간 적이 있었는데 출하 시간을 맞추려고 한밤중에도 비닐하우스에 대낮처럼 불을 밝혀 놓았더라구요. 하얀 형광등 불빛 아래서 크기도 똑같고 키도 똑같은 국화꽃 화분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는 광경은 마치 거대한 공장 같았어요. 벌레 하나 먹지 않은 하얀 꽃들이 어찌나 창백하고 질겨 보이던지. 조화보다도 더 조화같더라구요. 하긴, 사실 꽃도 이제는 공산품이라고 봐야죠. 유전자 변형부터 화학처리, 색소 주입까지 못하는 게 없으니까요.”

“저는 꽃이 그냥 예쁘다고만 생각했는데, 듣고 보니 정말 좀 불쌍한 생각이 드네요.”

자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신의 장광설에 주눅이 들었던 현태는 선영의 순순한 대답에 기운을 차렸다. 그때 웨이터가 음식을 들고 나타났다. 버터 특유의 고소한 누린내를 풍기는 음식들은 정갈하고 맛이 좋았다.

“이곳은 조용해서 좋네요. 저는 시끄러운 건 질색이라서요.”

그녀가 스파게티를 맵시 있게 포크로 말아 올리며 말했다. 그녀의 나긋나긋한 손목을 훔쳐보면서 그가 물었다.

“왜요?”

“전에 제가 일했던 곳이 무척 시끄러웠거든요.”

“아, 네에.”

어디서 일했었느냐고 물어봐야 하나 현태가 망설이는 사이 그녀는 현태가 묻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이었다.

“은행에서 일했었어요.”

“그래요? 그럼 돈은 아주 원 없이 세어봤겠는데요?”

그녀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럼요. 지문이 지워지도록 세어봤죠. 지금도 지갑에서 어림잡아 척 집으면 딱 10만 원이라니까요.”

현태 역시 미소를 지었다.

“은행은 하루 종일 얼마나 시끄러운지 몰라요. 그때 하도 질려서 지금도 시끄러운 곳만 가면 속이 메슥거려요. 사람들도 얼마나 가지각색인지. 그 사람들 비유를 다 맞추다 보면 정말 맥이 빠지죠.”

“그중에 기억에 남는 일이라도 있어요?”

“많죠. 음, 제가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드릴게요. 제가 있었던 곳이 중앙은행이라 한 달에 한 번씩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이 돈을 찾으러 왔었거든요. 2등이나 3등은 마냥 신이 나서 힘차게 걸어 들어와요. 그중에는 자기가 로또에 당첨됐다고 사람들 들으라는 듯이 큰소리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정작 1등은 어떤지 아세요? 은행 문을 들어설 때부터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눈동자만 좌우로 움직이는데, 너무 긴장한 나머지 뒤에서 누가 칼을 대고 협박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예요. 신중하게 한 걸음씩 옮기면서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아무 소용없어요. 벌써 은행 직원들은 모두 그 사람을 쳐다보고 있으니까요.”

현태는 기꺼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도 명랑하게 따라 웃었다.

"그런데 은행은 왜 그만뒀어요? 좋은 직장이잖아요.”

현태의 물음에 선영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견딜 수가 없더라구요. 시끄러운 것도 그렇지만 더 참을 수 없는 건, 뭐랄까, 그 냄새라고 할까요? 은행 특유의 냄새가 있거든요. 돈 냄새, 구리냄새, 먼지 냄새, 사람들 냄새, 그런 건조한 냄새들이 온통 뒤섞여서 목을 콱 조르는 것 같았어요. 나중에는 정말 몸까지 아프더라구요. 그래서 일을 그만 두고 꽃꽂이를 시작하게 된 거예요.”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그만두고 나서 후회하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안정된 직장이잖아요.”

“글쎄요. 후회한다기보다는, 아직도 제 결정에 확신을 못하겠어요. 그때는 참으면서 은행을 다니는 게 비겁한 타협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은행을 뛰쳐나온 게 오히려 비겁한 타협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녀는 또 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웃는 게 습관인 듯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저도 사실, 학교에서 법을 전공했었다가 때려치웠거든요.”

현태의 말에 그녀는 깜짝 놀랐고, 현태는 그녀보다 더 놀랐다. 그는 결코 자신의 학벌을 화제에 올린 적이 없었다.

“어머머, 그러세요? 법대 다니셨나 봐요? 와, 대단해요. 공부 잘하셨나보다. 그런데 왜 그만두셨어요?”

“그냥 법이란 게 말장난에 유치한 말싸움 같아서 싫더라구요.”

“왜요, 법은 정의를 잡기 위한 그물이다, 뭐 그런 말도 있잖아요.”

“그런가요? 하지만 법은 정의를 잡기 위한 그물이 아니에요. 오히려 추락하는 정의가 찢고 나가면서 생긴 구멍들로 너덜너덜해진 넝마에 가까워요."

"나쁜 사람들 때문에요?"

"아니요. 정의 스스로 뛰어내리는 거죠. 꼭 죽고 싶은 강박증에 사로잡힌 것처럼 곧장 뛰어내리고 또 뛰어내리고.....”

그러다가 현태는 멈칫했다. 선영 앞에서 자살에 대한 비유를 하다니 경솔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저기, 그래서, 저한테는 그냥 장사가 더 잘 맞는 것 같아요. 저는 불만 없어요.”

현태는 오늘따라 자신이 왜 이리 쓸데없는 말이 많은지 알 수가 없었다. 횡설수설하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도 됐다. 그때 문득 언젠가 수철이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사실 말이야 바른말이지 형이 뭐가 부족해요? 젊은 나이에 벌써 어엿한 가게 사장이겠다, 성격 좋겠다, 돈도 좀 모았겠다, 키는 좀 작지만 뭐 얼굴도 무난한 편이고……. 이 정도면 괜찮은 남자잖아. 그러니까 만날 살맛 안 난다는 얼굴로 시들거리지 말고 자신감을 좀 가져요.’

한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었는데, 요즘은 하루에도 몇 번씩 수철을 떠올리곤 했다. 이건 좋은 징조일까 나쁜 징조일까. 선영도 자살한 언니를 매일 떠올릴까?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차를 마시며 가게 월세, 꽃 관리 법, 꽃 냉장고의 성능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특별히 흥미로운 주제는 아니었지만 얘기는 끊이지 않고 조곤조곤 이어졌다. 모든 게 원만해서 그는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차를 다 마셔갈 때쯤 갑자기 그의 오른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당황한 현태는 어떻게 해서든 참아보려 했지만 점점 더 심해져서 어깨가 흔들릴 정도였다.

“어디 불편하세요?”

몸을 뒤척이는 현태의 동작에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선영이 물었다.

“아, 예. 갑자기 좀 그러네요. 열이 오르나 봐요.”

“진짜 감기 몸살이 단단히 드셨나 봐요. 오늘 아예 병원에 가실 걸 그랬어요. 빨리 집에 가서 약 드시고 푹 주무세요. 내일 꼭 병원에 가시구요. 네?”

“그럴게요.”

“대답만 하고 안 가려는 거죠? 제가 내일 꽃집에 들러서 병원에 갔었나 안 갔었나 확인할 거예요. 진짜루요. 그러니까 병원에 꼭 간다고 약속하세요.”

이것은 분명 지나친 간섭이었다. 그리고 간섭이야 말로 현태가 진절머리 나도록 싫어하는 것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조금만 덜 간섭했어도 그들의 사이는 지금보다 훨씬 나아졌을 것이다. 그러나 현태는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공손히 대답했다.

“알았어요. 내일 출근하는 길에 병원에 들를게요.”

“약속하는 거죠?”

“네.”

그녀의 표정에 의기양양함이 스쳐갔다. 놀랍게도 현태는 그것이 싫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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