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태는 점심을 먹고 나른하게 소파에 앉아있었다. 가게 안에는 묵직한 늦가을 햇빛이 넓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뜬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그의 몸에서 뽀얗게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는 무수히 많은 먼지들 중에 무작위로 한 톨의 먼지를 눈으로 좇았다. 그것은 너무나 미세해서 겨우 감지할 수 있는 정도였지만 유리가루처럼 빛을 내며 반짝거렸다. 먼지는 천천히 위아래를 오르내리더니 게발선인장 화분 위에서 한참 동안 머물다가 소용돌이를 그리며 햇빛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눈을 깜빡였다. 고작 10초가량이 지났을 뿐이었다.
그는 저녁이 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현지가 엄마와 담판을 짓겠다며 현태에게 미숙의 집으로 와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미숙도 단단히 벼르고 있는 중이어서 한바탕 큰 싸움이 될 게 뻔했다. 다른 때였다면 현태는 갖은 핑계를 대서라도 그런 자리는 피했을 것이다. 누구 편도 들 수 없는 골치 아픈 역할은 질색이었다. 결국 그들은 힘을 합쳐 자신을 탓하게 될 테니까. 하지만 현태는 이참에 자신의 병에 대해 가족들에게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더 이상 숨기기도 힘들었고, 그렇다고 무슨 중대 발표처럼 일부러 따로 불러 모으기도 면구스러웠다. 게다가 자신의 폭탄발언 덕분에 그들의 싸움도 잦아들 테니 일거양득이 아닌가. 과연 미숙과 현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파킨슨 병에 대해 알고는 있을까? 비린 날생선을 뼈째 씹어 삼키는 표정들이겠지? 어쩔 수 없이 그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그동안 이 장면을 머릿속으로 수없이 되풀이해서 그려보곤 했다. 눈을 감으면 이미 일어났던 일인 양 눈앞에 훤히 펼쳐졌다. 그들의 표정, 한탄, 질문,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대답과 위로도. 이제는 그럴듯한 본공연만 남은 것이다. 그는 그들이 자신들의 역할을 잘 해내리라는 걸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자신만 실수하지 않으면 공연은 성공적일 것이다.
그는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때까지 놀고 있을 수는 없었다. 둘러보면 해야 할 일이 잔뜩 밀려있었다. 그는 우선 가게 구석구석을 정리하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깨끗하게 해 놓아야 가게가 빨리 팔릴 터였다. 곰팡이가 잔뜩 피어있는 대바구니 꾸러미를 창고에서 막 끌어냈을 때 뒤춤에 꽂아 두었던 핸드폰이 울렸다. 받아보니 병규가 있는 고시원 관리인이었다. 현태는 한동안 병규를 까맣게 잊고 있었기 때문에 얼떨떨하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관리인이 다짜고짜 하는 말이, 병규가 며칠 째 보이지 않아 방에 들어가 봤더니 - 여기까지 들었을 때 현태는 그만 신음소리를 낼 뻔했다 - 병규가 짐을 싸가지고 어디론가 떠나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오늘 내로 남은 짐을 모두 정리해서 퇴실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리곤 현태가 묻기도 전에 자신은 병규가 어디로 갔는지 아는 바가 없으며, 어떻게 아들이 아버지가 어떻게 지내는지도 몰랐느냐고 면박까지 주었다.
안도했던 것도 잠시 뿐이고 전화를 끊자마자 현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물론 병규가 떠나 준다면야 현태로서는 대환영이었다. 지척에서 늘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했으니 이제는 발 뻗고 편히 잘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가면 간다고 말은 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자신은 그래도 아들이랍시고 최선을 다했는데 그 대가로 이렇게 호되게 뒤통수를 때리다니, 남들이 - 고시원 관리인뿐이지만 - 보기에 이런 창피가 있나. 가게 안을 빙글빙글 맴돌던 현태는 이를 갈며 병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다시 걸어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는 병규가 핸드폰마저 정지시켜 버렸다는 걸 알았다. 이제 현태 쪽에서 병규에게 연락할 방법은 사라진 것이다. 약이 오른 현태는 핸드폰을 소파 위로 집어던지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물론 그동안 현태가 병규를 챙기지 못했던 건 사실이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연락했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너절한 고시원에 처박아 놓고는 마치 병규가 땅 밑에 묻히기라도 한 것처럼 깡그리 잊고 지낸 것도 인정했다. 하지만 요즘 들어 그에게도 온 힘을 다해 견디고 해결해야 하는 버거운 사정들이 있지 않았나. 파킨슨병에, 현지의 귀국에, 가게 처분이며 선영의 일까지 그의 숨통을 틀어쥐고 있는 힘껏 늘어졌던 것이다. 그 와중에 아버지에게 - 그것도 명색뿐인 아버지에게 - 잠시 소홀했다고 해서 그가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건 정말이지 부당한 일이었다.
분한 마음에 현태는 그대로 꽃집을 내팽개쳐 두고 고시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훈계조로 툴툴거리는 관리인의 안내를 받으며 병규가 묵었던 방의 문을 열었을 때 - 이미 한 번 와봤음에도 불구하고 - 현태는 길게 혀를 차고 말았다. 좁디좁은 방은 처음보다 더 초라해 보였다. 내내 커튼이 쳐져 있어서인지 싸늘하고 음침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침대에 누우면 네모반듯한 벽과 천장이 그대로 목젖까지 내리누를 것만 같았다. 병규가 말없이 사라진 건 여전히 괘심 했지만, 누구든 사지만 멀쩡하다면 이곳에서 도망치고 말았을 것이다.
“정리하고 내려오세요. 거기 쓰레기까지 다 치우셔야 돼요.”
관리인이 나가자 주변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사람들이 지금 방에 없는 건지, 아니면 아예 입주자가 없는 건지, 고시원 전체가 폐건물처럼 텅 빈 것 같았다. 아니면 모두들 죽은 듯이 숨을 죽이고 있는데 너무나 익숙해진 것일까. 아니면 죽은 듯이 숨을 죽이고 있는데 너무나 익숙해진 사람들만 남아있는 것일까. 현태는 침대 모서리 끝에 주저앉아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좁고 네모난 천정을 우두커니 올려다보았다. 몇 달 동안 병규가 이 방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현태는 알 길이 없었다. 아버지의 핏줄을 반쪽이나 타고났는데도 가늠할 수 없는 이 엄청난 간극은 편리하지만 동시에 모질었다. 병규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어디로 가든 눈칫밥을 피하기 어려울 텐데. 참으로 형편없는 말년이 아닌가. 하지만 현태는 어느새 병규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어쨌든 병규는 이제 홀가분했다. 늙고 가난하고 비참하지만 거칠 것 없는 그의 인생은 다시 한번 어디선가 새롭게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병규는 현태보다 더 오래 살지도 모른다.
현태는 병규의 짐을 싸들고 고시원을 나오면서 - 쓸 만한 건 병규가 모두 가져갔기 때문에 남은 거라고는 다 떨어진 옷 몇 장과 쓰레기뿐이었다 - 혹시 병규가 남은 짐이라도 찾으러 오면 꼭 자신에게 연락을 달라고 관리인에게 신신당부해 놓았다. 물론 병규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후레자식 취급하는 관리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면피성 행동에 불과했다. 사실 병규를 다시 만난다 해도 현태에게는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는 병규를 이 고시원으로, 혹은 또 다른 고시원으로 보내고 말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현태가 병규의 짐을 한쪽에 던져 놓았을 때는 이미 현지와의 약속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약을 먹은 뒤 약효가 돌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택시를 타고 미숙의 집으로 향했다. 이미 몹시 지쳐버린 그는 택시 안에서 내내 졸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