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by 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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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말, 몽골로 떠나던 저녁 비행기. 여행의 설렘은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시작된다.


나는 왜 여행을 가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보곤 한다. 10년짜리 여행 계획을 노트에 적어두고, 회사 퇴직금을 탈탈 털어서 남미 일주를 하고, 심심하면 항공권을 조회해보고, 내가 가지 않는 다른 이의 여행 일정을 짜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스스로를 보고 있노라면 난 대체 왜 이럴까 진심 궁금해질 수밖에 없달까. 사주에 방랑벽이라도 있는건지(딱히 그렇지는 않았는데). 왜 항상 어딘가로 떠나고 싶을까.



#1 일상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자극

"산다는 것은 경험하는 것이지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To live is to experience things, not sit around pondering the meaning of life)." - <알레프Aleph>, 파울로 코엘료Paulo Coelho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성격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분명 큰 이유다. 익숙한 것에 벗어나 마주하는 새로운 세상은 늘 짜릿했다. 이국적인 풍경과 낯선 풍속, 새로운 미식으로의 경험은 나의 의식을 사로잡았다. 욜링암의 검고 푸른 대자연이 주던 청량감, 이스탄불에서 새벽마다 나를 강제로 깨우던 새벽 기도 소리, 에즈의 샤또 에자Chateau Eza에서 욕심껏 모두 받았던 식전빵-큰 바구니에 담긴 바게트와 올리브빵, 그리고 견과빵 중 하나를 직접 고르도록 권했지만 세 개 모두 다 맛있어 보이는 바람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세 종류를 모두 달라고 했다. 부끄러움은 잠깐이었고 행복은 오래갔다. 책이나 영상으로 접했던 것들을 실제로 눈으로 보는 것도 좋았다.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모네의 수련 연작을 찬찬히 뜯어보면서 공간을 가득 채우는 파랑과 초록을 만끽하는 것도 좋았고, 런던 웨스트엔드의 전용 극장 박스석에서 레미제라블의 "Red & Black"을 바로 앞에서 듣자니 가슴에서 혁명의 불덩이가 용솟음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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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xotic Garden(Le Jardin Exotique), Eze Village, France


#2 순간을 살기

"여행의 시간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걷고, 보고, 먹고, 자는 아주 단순한 생활이 반복된다. 일정이 정해져 있지 않은 자유여행이라면 더욱 그렇다. 생활이 단조로우면 생각도 단순해진다. '오늘 어디를 갈지, 오늘 무엇을 먹을지, 오늘 어디서 잘지, 다음날은 어디로 갈지'이 네 가지 외에는 별로 생각할 게 없다. 불필요한 생각이나 고민을 위한 고민에 빠질 틈이 없다...여행의 시간동안 우리의 생각은 단순해지고 외부의 세계는 보다 명료하게 보이며 우리는 이 순간에 머무른다."- <여행하는 인간>, 문요한


그 다음 생각한 것은 해방감이었다.

일상은 번다하다. 지금은 그 다음을 걱정하고 그 다음에는 또 그 다음의 걱정을 떨칠 수가 없다. 걱정의 내용은 유쾌하지 않은 것들 투성이다. 일과 관계, 처리해야할 용무, 현실의 어른이 되기 위한 이런저런 자잘한 것들. 그러다보니 순간순간의 삶에 충실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여행은 달랐다. 여러 여행에서 늘 엄청난 행복감을 느꼈다. 해야되는 고민은 내일 뭐하지, 내일 뭐 먹지뿐이었다. 그저 쉴 고민이면 충분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에 감각이 활짝 열렸다. 특히 혼자 있을 때면 이 느낌은 더없이 충실했다. 자연과 감동적인 합일을 이루는 순간들이 있었다. 지금 내가 이 순간 이 장소에 오롯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의 충만감. 그것은 외로움과 거리가 먼, 행복한 경험이었다.

나에게도 기적처럼 느껴지는 그런 순간들이 몇 번 있었다. 발리에서 화산 호수를 내려다보며 맞이했던 일출이 그랬고, 페루 쿠스코에서의 홀로 나섰던 아침 산책이 그랬고, 몽골 초원의 석양 속에서 양떼를 홀로 쫓던 시간이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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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a Organ(Morske Orgulje), Zadar, Croatia

해질녘이 되면 자다르의 모든 여행자들이 바다 오르간의 계단참에 앉아 있다. 이곳의 유명세는 영화 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이 자다르의 일몰을 두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양"이라고 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3 뜻밖의 일들

그런데 정말 여행에서 제일 재밌었던 순간들은-내가 얼마나 여행 계획을 많이 세우는 편인지를 생각하면 역설적이게도-계획하지 않았던 작은 행운이 일어나거나 소소한 친절을 마주쳤을 때이기도 했다.


푸켓에서 피피섬에 들렀을 때, 섬에 풀어둔 원숭이들이 있었다. 먹이를 주면 가까이 와서 그것을 받아 먹는 모양이었다. 먼 발치서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는데, 웬 외국인 여자가 다가오더니 자신은 이제 투어 보트가 돌아가는데, 먹이로 주던 과자가 남았으니 나보고 이걸 쓰란다. 덕분에 그러고도 과자는 남아서, 나도 그 섬을 떠나며 이제 막 섬에 도착한 다른 여행객에게 그 봉지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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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 Phi Island, Krabi, Thailand

마치 오병이어의 기적과도 같은 먹이 나눔. 친절은 또 다른 친절을 불렀다.


부다페스트를 여행할 때, 일행이던 친구의 회사 지인이 잠시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나는 그때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았다. 경유편에서 수화물이 제대로 비행기에 실리지 못해, 여행 중 처음으로 수화물 대기라는 사태를 겪고 있었다. 촉박한 일정으로 하루마다 도시가 아니라 국가가 바뀌는 일정을 소화하는 상황에서 수화물이 제대로 오지 않은 건 너무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동행은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선사했다. 성격이 발랄했던 그녀는 자꾸만 우울해지는 나를 기분 좋게 위로해줬다. 그녀는 마치 한참을 알고 지낸 사이처럼 자기 얘기를 편하게 해주었고 나도 내 얘기를 편하게 수다떨 수 있었다. 참 고마웠다.

둘이 아닌 셋이 다니니 소소한 잇점도 있었다. 레스토랑에서 주문을 할 때 좀 더 다양한 메뉴를 시킬 수 있었다. 먹보인 우리 셋에게 참 기쁜 일이었다. 날씨는 계속 흐렸지만 기분은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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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명이서 시킬 수 있는 메뉴는 풍족했다.


일상은 논리와 문맥으로 가득차 있고, 이것에서의 이탈은 스트레스일 뿐이다. 이미 계획한 일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상태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돌발적인 상황은 대체로 또다른 궁리를 요구할 뿐이다. 그러나 여행에서의 시간은 보다 여유롭기 때문에, 예정되어 있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보다 너그러울 수 있었다. 하물며 그것이 작은 행복이나 소소한 친절이라면 두 말 할 필요가 없었다.


#4.영혼의 대화

비교적 최근에 깨달은 것이 있다. 늘 여행의 '장소'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보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해보고 싶은 것 위주로 여행 계획을 세우곤 했었다. 하고 싶은 걸 같이 해줄 수 있는-그것이 시간이 되었든 취향이 되었든 -이면 '조건이 맞는다'라고 생각했고 그것이면 그만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시간이 어떻게 '채워질지'에 대해서는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러 번의 여행 끝에 이건 여행의 일부만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누구와 함께 여행을 하는지도 중요한 일이었다. 여행의 작은 단위들이 어떻게 채워지는지는 동행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이제는 동행을 생각하는 데에도 좀 더 신중해졌다. 나와 함께 영혼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중요했다.




요새, 그러니까 코로나 이후에는 여행의 의미 자체에 대해서도 새롭게 생각해보게 된다. 최소한 외국은 나가야 일상을 벗어나는 여행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일상 속에도 작은 새로움을 발견하고 순간을 오롯이 살아내고 의외의 즐거움을 마주치는 것 모두 가능하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어느 날인가 집앞의 노을이 사실 굉장히 예쁘다는 걸 깨달았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유의 문제였다. 신경 써서 보면 되는데 그걸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요새는 일상에서도 여행을 떠난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 삶이 더 촘촘해지고 소중해질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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