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세상이 열리는 시간

Batur Caldera, 인도네시아 발리

by 와이

자정 무렵에 잠이 깨었다. '여행지에서의 설레는 기분' 운운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밖에서 엄청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소나기였다. 검은 밤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거센 소나기가 몰아치고 있었다.


가끔은 여행지에서의 아침이 굉장히 계획적으로 시작되곤 하는데, 이날이 바로 그랬다(2017.05.06). 이날은 발리 우붓에서 출발해서 바투르 산Mt.Batur의 칼데라Batur Caldera 트레킹 투어가 예약되어 있는 날이었다. 트레킹을 해야하는데 새벽부터 장대비라니!

한국인의 여행 계획에 여유 일정따위 두었을리 없으니, 이날이 안되면 칼데라 구경은 어림도 없었다. 더군다나 이 투어를 위해 많은 것을 조정한 상태였다.

발리 중부에 위치한 우붓에서 출발해, 오직 바투르 산을 들리기 위해 발리 북부를 찍고 오는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은 일정을 무리해서 만든데다, 그날 숙소는 다시 발리 남부에 위치한 짐바란이었으므로 투어가 끝난 뒤엔 한참을 이동해야 했다. 이를 위해 가격이 나가는 소규모 그룹 투어를 예약했고, 별도로 추가금도 지불해둔 상태였다.

숙소도 새벽에 체크아웃을 해야 하는데 비싼 숙소에 머무르기 아까워 이틀 동안 머무르던 비스마 에잇Bisma Eight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저렴한 숙소ThreeWin Homestay로 옮긴 상태였다. 포장 상태가 영 좋지 않은 우붓의 골목길에 20kg도 넘는 캐리어를 낑낑대며 도착한 숙소의 객실은 심지어 가파른 계단을 통해 올라가야 하는 2층이었다. 땡볕에 죽을 맛이었다. 바로 전날까지 잘 가꾸어진 열대 정원의 멋진 숙소에 머무르다가 휑한 대리석 바닥의 싼 숙소에 머무르자니 기분이 조금 그랬지만 1박에 채 3만원도 안하는 숙소에 불평은 삼가야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초조한 마음에 업체에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통화가 되지 않았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겨우 연결이 되었다. 지금 비가 이렇게 오는데 정상적으로 투어 진행이 가능한지를 물었지만, 아마도 괜찮을 거라는 명확하지 않은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래도 눈을 붙여야지 싶어서 억지로 잠을 청하려 했지만, 세상을 씻어낼 기세의 빗소리에 뜬 눈으로 날밤을 샜다. 다행히 어느 순간 빗소리가 그쳤다.

그렇게 해가 뜨려면 아직 한참 먼 새벽 네시에 간신히 투어 업체 사람들을 만나 차량에 탑승했다. 비록 비는 그쳤지만 비온 직후의 산길이 미끄러울 게 분명해 트레킹이 괜찮을지 불안했지만, 가이드의 영어가 짧아 영 원하는 답을 얻을 순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길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는 칠흑같은 어둠 속에 투어는 시작되었고, 나는 덜컹이는 차량 안에서 모자란 잠을 청하며 비몽사몽간에 그대로 실려갔다.


한참을 달린 끝에 차량이 멈추어섰다. 어느 새 동이 터오고 있었다. 점차 밝아오는 하늘 아래에서 두 명의 가이드와 나와 내 일행은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는데, 그건 트레킹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것이었다. 제대로 마감되지 않은 시멘트가 부어진 허름한 동네길은 관리가 되지 않은 채 울퉁불퉁 방치되어 있었고 쓰레기 더미가 옆으로는 흉물스럽게 쌓여 있었다. 새벽 공기가 충만한 촉촉한 흙길을 걸을 거라고 생각했던 내 기대는 멋지게 무너졌다. 그와중에 아뿔싸, 일출 사진을 멋지게 찍어보겠다며 무거운 카메라를 챙겨왔지만 배터리를 빼먹은 걸 뒤늦게 발견했다. 도무지 이 일출 트레킹은 잘 풀릴 것 같지 않았다.


길지 않은 걷기 끝에 칼데라 정상에 도착했다. 산마루 너머로 노란 해가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평생 그 순간을 잊을 수 있을까?

아침 안개가 자욱히 피어올라 칼데라의 마을을 온통 적셨다. 희뿌연한 물안개 속에서 옹기종기 서있는 집들의 흰 벽이, 물이 찰랑이는 논밭이 어슴푸레 드러나며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온 세상이 황금빛이었다. 안개 너머로 떠오르는 태양은 그 경계가 모호했다. 태양은 무대 장막 뒤 강렬한 조명처럼 눈이 닿는 모든 곳에 자신의 존재를 화려하게 드러냈다. 안다고 생각했던 세상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것이 되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차올랐다.

세상은 더할 나위 없이 충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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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tur Caldera, Bali

평생 이 순간을 잊을 수 있을까?


마을 아주머니가 한 분 올라오더니 즉석에서 우리의 아침식사를 준비해주기 시작했다. 작은 불을 피워 계란을 부쳐내고 대바구니에 내주었다. 황금빛으로 물든 세상 속에서 먹는, 갓 부쳐낸 계란은 따뜻하게 속을 채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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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tur Caldera, Bali

지금까지도 특별할 게 없는 이 계란부침의 맛을 잊지 못한다


점차 안개는 걷히고, 새파란 하늘 그리고 그에 못지 않게 새파란 칼데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이 풍경을 고화질로 찍을 수 있는 카메라는 쓸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런 건 더이상 신경쓰이지 않았다. 무리해서라도 오길 잘했어, 질리지 않는 풍경을 한없이 내려다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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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tur Caldera, Bali

세상에 완벽한 게 있다면 바로 지금 여기일거야


같이 그룹투어를 하던 싱가포르 사람들이 자신들이 찍은 사진에 내가 나왔는데 잘 나온 것 같다며 말을 걸어왔다. 기계에 밝았던(?) 그들은 내가 아이폰을 쓰는 것을 보더니 에어드롭을 써서 사진을 주겠다고 했고, 나는 덕분에 발리 산속에서 생전 처음으로 그 기능을 써보았다.


※번외이지만 이 당시 포켓몬고를 한창 열심히 하던 때라 이 신비의 장소에 엄청난 포켓몬이 있지 않을까 약간 기대를 품고 있었다. 바투르 칼데라 한복판에서만 잡히는 신비의 포켓몬! 그러나 현실은 아무 포켓몬도 출몰하지 않았다. 심지어 (당연하게도) 네트워크 신호 자체가 나빠서 제대로 포켓몬고를 켤 수조차 없었다. 최소한 미뇽 정도는 기대했는데...




글을 쓰는 지금도 이 날의 모든 감각이 생생하다.

차가운 새벽 공기, 조용히 차오르는 아침 햇살,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세상.

나를 들뜨게 했던, 그 모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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