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별>, 체호프 <낯선 여인의 키스>, 서유미 <밤이 영원할 것처
날이 부쩍 쌀쌀해졌고 소설 생각이 났다. 단편은 긴 시간 몰입해야 하는 장편보다 감정 소모가 덜하고 틈틈이 읽기에 좋다. 책에는 답이 없지만 좋은 소설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어른스러운 사람이요.
어릴 때 누군가 이상형을 물으면 대충 이렇게 답하곤 했다. 어쩌면 ‘어른’은 내가 되고 싶은 이상적 인간형이었는지도 모른다. 능숙함과 여유, 어른의 전유물처럼 보이는 세련됨과 노련함은 살아온 경험의 축적에서 비롯된다. 어떤 분야든 오래 반복된 시간이 쌓이면 얼마간 갖추게 되는 자질이기도 하다. 세상에 쓸모없는 경험은 없고 정성된 시간의 밀도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흔히 책을 간접 경험이라고들 한다. 그렇다면 책을 많이 읽어도 어른이 될까.
그렇지는 않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아무리 많이 읽어도 직접 겪어야만 알게 되는 것들이 있게 마련이고 인간의 호기심과 나약한 본성은 책이 주는 얄팍한 지혜보다 강력하다. 그런 면에서 독자는 필연적으로 늦게 아는 자 에피메테우스의 운명을 면치 못한다. 다만 과거를 돌아보며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하는 위로와 일말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것. 절망과 자책의 나락에 잠시 허우적대다가도 일상 궤도로의 회복이 빠르다는 점은 책이 주는 위안이겠다.
단편집 세 권을 읽었다. 안톤 체호프 《낯선 여인의 키스》, 서유미 《밤이 영원할 것처럼》, 한강의 《작별》이 실린 김유정 문학상 수상작품집. 한강의 《작별》, 체호프 단편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은 다시 읽어도 새록새록 좋다.
작별ㅣ한강
다른 장편에 비해 노벨문학상 이후 이슈화되지는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단편. 카프카의 변신 속 그레고르 잠자가 자고 나니 벌레가 되었다면, 작별의 주인공은 잠들었다 깨어보니 눈사람이 되어 있다. “존재와 소멸의 경계를 소설의 서사적 육체를 통해서 슬프도록 아름답게 재현해 놓은 작품”이라는 심사평도 근사하지만, 언젠가 어렴풋이 느꼈던 감정이 정확하게 묘사된 문장을 읽을 때의 희열이 있다. 이를테면 그녀가 현수와의 사이에서 느꼈던 ‘실’에 관한 묘사. 두 사람 사이에 고요히 걸쳐져 있던 실의 감각이 눈사람이 되면서 사라진 순간의 상실감. 그 절묘하고 문학적인 표현들이 특히 좋았다.
낯선 여인의 키스ㅣ안톤 체호프
인간은 일기 쓸 때도 거짓말을 한다던데. 일기장에도 쓰기 부끄러운 내 안의 찌질함, 모순, 시시콜콜한 감정들을 위트 있고 매력적으로 그려놓기로는 안톤 체호프가 최고 아닐까. 세상에 숭고하고 아름다운 사랑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욕망과 권태, 착각과 나르시시즘으로 점철된 사랑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한걸음 거리를 두고 보면 명백할 진실은 감정 안에 빠진 순간 가려지고 만다. 표제작 외에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농담》이 좋았다. 삶은 아름답고도 잔인한 것이니 매사에 큰 의미를 두지 말라고 체호프는 말하는 것 같다.
밤이 영원할 것처럼ㅣ서유미
평범한 이들이 겪는 사랑과 상실. 서유미 소설이 좋은 이유는 저마다 크고 작은 상실을 고요히 견디며 무언가를 기다리는 인물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밤이 영원할 것처럼》의 첫 번째 수록작 《토요일 아침의 로건》에서 로건이 잃은 것은 표면적으로 젤다와 함께한 주말 영어 회화 수업이지만, 그 상실감의 진짜 이유는 갑작스러운 뇌종양이고 이로써 로건이 오래 꿈꿔 온 미래는 완전히 방향을 바꾸게 되었음을 소설은 암시한다. 담담히 그려진 마지막 장면에서 독자는 스스로가 잃은 것을 떠올리지만 그것도 잠시, 삶은 계속된다. 다만 살아있다면 희망은 있다는 것. 대단한 서사는 없지만 세밀화 같은 일상 묘사, 나와 비슷한 결핍을 가진 인물들은 읽는 내내 묘한 안도감을 준다.
어른다워야 하니까 괜찮은 척하다 보면 솔직해지는 법을 잊어버린다. 어른이니까 외롭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어른아이들이 소설에서 위로받는 이유는 그래서가 아닐까. 소설을 읽는 일은 인생의 오답을 복기하는 일과 비슷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금세 잊고 기어이 또 오답을 고를지도 모를 일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