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지를 심다, 도라지)
어린 도라지를 주며 심어보란다. 이웃의 인심이다. 심을 땅도 마땅치 않고, 생각지도 않던 일이라 잠깐 망설이다 얼른 받았다. 늘 고마운 이웃이다. 남은 빈 땅에 도라지를 심었다. 보랏빛 꽃을 기대하면서 정성 들여 심었다. 시골에서 가끔 만나는 삶의 재미이다. 지난해에는 옥수수 모종을 얻어 심었더니 제법 많은 옥수수가 달렸다. 농사라고는 아는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이다. 이웃이 시키는 대로 심고 거둘 뿐이다. 심은 대로 나고 자라게 하는 대지도 고맙지만, 살갑게 도와주는 이웃들이 늘 고맙다는 생각이다.
오래전 뒤뜰엔 도라지가 있었다. 여름이면 보랏빛 꽃을 피웠고, 더러는 흰색 꽃도 피곤했다. 장독대 앞엔 어울리지 않는 무궁화나무가 있었는데, 분홍 꽃이 피면서 화려함을 얹어 주기도 했다. 무궁화나무 뒤편으로 자그마한 밭에 도라지가 자라고 있었다. 반듯하게 열을 지어 심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먹음직한 도라지가 자라고 있었다. 아마, 어머님이 심으신 듯했다. 농사일로 바쁘신 어머님이 정성껏 돌보지는 않는 밭이기에 풍성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기가 도라지 밭이라는 것은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다. 가끔 어머니는 도라지로 반찬을 해주시곤 했다. 삽으로 깊숙이 파서 도라지를 캔다. 뿌리를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도라지는 굵으면서도 향이 대단했었다. 땅에서 뿌리가 드러나자마자 도라지 향은 강하게 진동했다. 마치 반항이라도 하는 듯이 진하게 풍겨왔다. 땅 속에서 얼기설기 뿌리가 엉켜 자랐다. 짙은 향이 나는 도라지를 잘 씻어 적당한 크기로 가르고 자른다. 갖은양념을 한 고추장에 도라지를 무치고, 고소한 깨가 고명으로 앉으면 젓가락은 멈출 수가 없다. 대단한 입맛을 돋워주었다. 뒷산에서도 가끔 산도라지를 만날 수 있었다. 운이 좋은 날이다. 보랏빛 꽃을 피운 도라지다.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청보라 빛이 맑게 빛난다. 하얀 햇살이 내린 잎에서 튀어나온 빛은 눈이 부시다. 청보랏빛이 아름다우며 그렇게 맑을 수가 없었다.
도라지, 길경(桔梗)·백약(白藥)·경초(梗草)·고경(苦梗)이라고 하는데, 梗은 도라지를 뜻한다. 도라지에는 인삼에 함유된 사포닌이 많은 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편도선염과 기관지염 그리고 인후염 등에 좋다고 알려져 있고, 기침을 멎게 하며 가래를 없애는 데는 배도라지가 효험이 최고란다. 배와 도라지를 함께 달인 것이다. 자연에서 만날 수 있는 도라지는 대부분 보라색이고, 흰색은 보기 드물다. 우리 민요에도 도라지가 등장한다.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우리 귀에 익숙한 민요이다. 도라지는 산이나 들에 저절로 자라기도 한다. 저절로 자라는 도라지는 보라색 꽃이 많고, 밭에 재배하는 것에는 흰 꽃이 많다고 한다. 흰꽃이 피는 도라지를 백도라지라고 하며, 꽃이 겹으로 피는 것을 겹도라지라고 한다. 요즈음은 흑도라지도 있다고 한다. 귀한 약재라 하여 깊은 산속 낭떠러지도 마다하지 않는다. 도라지 꽃에는 오묘함도 숨어 있다. 옥수수나 호박과는 다른 위엄을 갖추고 있다. 암수가 한 그루에서 피는데, 피는 시기가 달라 자가 수정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수꽃이 먼저 꽃을 피워 꽃가루가 날아간 후에 암꽃이 피어난다고 한다. 자연의 신기함이 숨어있는 꽃이다.
요즈음엔 굵직한 도라지를 항시 만날 수 있다. 도라지를 잘게 쪼개 상큼한 고추장에 무쳐먹는 맛은 언제나 만날 수 있는 반찬이다. 거기에 오이와 양파를 썰어 넣으면 더 맛깔난 맛이다. 굵게 살찐 도라지를 칼자루로 살살 두드린다. 도라지가 얇게 다져지면 마늘과 달래 등 갖은양념이 곁들인 양념장을 바른다. 석쇠에 얹어 적당히 구워 낸 맛은 포기할 수 없는 맛이다. 쌉쌀하지만 감칠맛 나는 도라지의 변신이다. 입맛이 살아나면 달큼함도 찾을 수 있다. 멋진 도라지 맛이다.
쉽게 만날 수 있는 도라지는 맛이 좋다. 하지만 심심산골에서 자란 도라지 맛을 당할 수야 있겠는가? 작지만 품위가 있고 당당함이 있다. 잘 생기진 않았지만 떳떳함이 있다. 누구의 손길 없이 자랐지만 깊은 향이 있다. 모진 비바람을 버티며 살아온 도라지다. 구김이 없고 굽힘이 없는 산도라지를 따를 수가 있을까? 언제나 당당함을 잃지 않는 그 도라지 맛을 잊을 수 없다. 온실에서 곱게 자란 도라지 맛과 비교가 되겠는가? 시골집 뒤뜰에서 소리 없이 자란 도라지 맛도 일품이었다. 잊을 수 없는 도라지 맛이었다.
추억과 즐거움으로 도라지를 심었다. 밭 가장자리에 심은 도라지가 편하게 자리 잡길 기대한다. 비를 맞고 햇살을 받으며 자랄 것이다. 자기 멋대로 자라게 놓아줄 생각이다. 뿌리는 뿌리대로 잎은 잎대로 자라게 두어야겠다. 이웃 덕에 시골집에 귀한 꽃 식구가 늘었다. 영산홍과 꽃잔디가 꽃을 피우고 나면, 흰 철쭉이 꽃을 피울 것이다. 뒤따라 자리 잡고 몸집을 불린 하얀색 도라지꽃도 동참할 것이다. 인간의 꾸밈없는 도라지 꽃이 필 것이다. 공작 단풍이 마당을 훅하고 물들이면, 금계국이 꽃을 피우고 귀한 구절초도 참을 수 없다. 꺽다리 달맞이 꽃이 노란 꽃을 피우는 날, 하얀 도라지꽃이 함께하는 꽃들의 잔치를 기대해 보는 봄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