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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마냥 Jun 05. 2021

신비한 수채화 전시회를 했다.

(수채화 전시회)

자그마한 시골집, 가끔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한가한 산 뻐꾸기 빈 하늘 반으로 자르며 날 때, 뒤뜰 감나무에선 설익은 감이 툭하고 떨어진다. 언제 그랬냐는 듯 감나무 시치미 뚝 떼고, 시골집은 다시 고요 속으로 숨어든다. 어머니는 채마밭에 가시고, 아버지는 먼 다락논에 김매러 가셨다. 채마밭 일을 대충 끝낸 어머니 허겁지겁 들밥을 이고 다락논으로 달려가야만 했다. 한가한 초가지붕 위로 커다란 감나무가 손을 뻗치면 어느새 아기 조막만 한 풋감이 바람 그네를 탄다. 평화스럽지만 가난이 가득 서려있는 어릴 적 소박하고도 평화스러운 집에 대한 생각이다. 


초등학교를 다닌 시골을 떠날 즈음까지 미술이라는 것은 돈 많은 사람들의 사치이고,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구경거리로만 생각되었다. 중학교에 입학하여 파스텔이라는 신기한 것을 처음 만났고, 그 후로는 미술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고단한 시골생활에도 자식 공부에 아낌이 없었던 부모님 덕에 그럴듯한 도시의 명문고에 힘겹게 입학했다. 모든 면에서 삶의 환경에 따른 문화적인 차이는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일이었다. 특히, 예능에 관한 지식이라고는 전혀 없었으니 언제나 남의 일처럼 생각하며 살아야 했다. 은연중에 남아 있던 응어리를 풀어보고자 시작했던 수채화였다. 시작한 지도 거의 10년 가까이 되지 않았을까?


아내와 함께 시작한 수채화 전시회를 하는 날이다. 제법 커다란 작품을 아내와 함께 두 작품씩을 걸기로 했다. 제법 커다란 네 작품을 간신히 차에 싣고 전시장으로 향했다. 50호짜리가 네 점이니 옮기기에도 여간 힘겨운 것이 아니다. 전시장에 도착하여 3층으로 올리는데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땀을 흘리며 쩔쩔매는 모습을 바라보던 한 안내인이 얼른 다가오더니 동료에게 말을 건넨다. 작가님을 도와 작품을 전시장까지 옮겨 드리라는 것이다. 작품을 옮기던 나는 깜짝 놀랐다. 안내인이 보기에는 나와 아내가 '작가'로 보였나 보다. 작가라는 이름을 붙이며 부르는 모습에 뿌듯하면서도 부끄럽다는 생각이 퍼뜩 든다. 작가? 내가 작가라고?

아홉 명의 동회회원들이 나름대로의 정성 어린 작품을 들고 전시장에 모였다. 다 같이 작품을 걸고, 조명을 맞추며 전시장을 꾸며 놓았다. 그럴듯한 전시장 모습이 제법 뿌듯함을 준다. 시골에서 자란 덕에 자연과 소통하고 즐거워하는 삶은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예능에 대한 부족함은 늘 가슴에 남아 있었다. 그림을 그리러 다니고, 피아노를 배우러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은 늘 다른 사람의 삶이려니 했었다. 나도 그런 삶을 살 수는 없을까? 그림 몇 장 그린다고 그에 대한 보상이 될 리는 없다. 부족한 예술에 대한 지식이 하루아침에 생길 수도 없다. 하지만 몇 달 동안 심혈을 기울여 손수 그린 작품을, 그럴듯한 전시장 한 구석에 자리를 잡게 했다. 


10년 가까이 아내와 함께 묵묵히 다닌 화실이었다. 수채화, 만들어진 색깔을 물과 혼합하여 캔버스에 옮겨 놓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색깔의 오묘한 세계였다. 참으로 신기했다. 색의 조합에 따라 달라지는 다양한 색의 변화가 그랬다. 걸음마도 하지 못하던 수채화, 캔버스에 다양한 색을 만들어 붓질을 한다. 색의 조합에 따라 오묘한 모습으로 변하는 색깔이 신비스럽기만 하다. 물과의 어울림이 묘한 신비함을 드러낸다. 물의 양에 따라 변하고, 붓의 방향에 따라 분위기가 변한다. 캔버스에 올려놓은 색이 마르며 변하는 캔버스의 분위기에 마법을 느껴본다. 다양한 색들의 조화가 '이래서 예술이라고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예술을 한 순간에, 몇 년 동안에 알 수가 있겠는가? 어림도 없다는 생각을 늘 하면서 화실로 간다. 10년 가까이 묵묵히 화실로 오갈 수 있었던 것은 아내와 함께여서 가능했을 것이다. 전시회에 그림을 걸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덕분에 동호회원들과 어울려 작품전시회를 한 것이다. 수채화 전시회가 그렇고, '작가'라는 단어가 늘 어색하다. 전시회를 할 수 있는 나의 작품인가도 늘 고민을 한다. 전시장에 걸어 놓은 그림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생각에 전시장에선 내 그림을 잘 보지 않는다. 누가 물어봐도 잘 대답을 하지 않는다. 부족한 나의 실력을 알고 있고, 늘 그림을 보면 쑥스러워서이다. 


오늘은 전시회장에서 안내를 한다. 가끔 찾아오는 사람들이지만 작품을 보고 신기해한다. 물감으로 그린 것이냐고 묻는다. 쑥스러워 불편하기도 하지만 뿌듯하기도 하다. 용기를 내서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언제 수채화를 접해 보겠는가? 수채화 전시회를 해본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부족하지만 시작을 잘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론 가당치도 않은 수채화를 한다는 말을 듣고, 수채화 전시회를 한다는 생각에 자랑스럽기도 하다. 아내와 함께하는 그림이니 더욱 그렇다. 전시장에 들어가는 입구엔, 어울리지 않는 '작가'라는 단어에 눈을 돌리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 나는 대로 도전해 보는 수채화가 통쾌한 쾌감과 즐거움을 준다. 세상 일 중에 어렵지 않은 일이 있을 수 있다던가? 어렵지만 한 번쯤 해 볼만한 도전이라 생각해 보는 수채화 전시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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