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깨우는 소리)
새벽부터 느닷없이 으르렁대는 소리에 잠이 깼다. 무슨 소리일까? 창문을 열고 바라보는 앞산, 토끼몰이를 하듯이 10여 명이 풀을 깎으며 산을 내려오고 있다. 깎아지른 듯이 가파른 산을 순식간에 정리하며 내려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 앞산에 심은 어린 자작나무의 생육을 보호하기 위한 풀베기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몇 해전까지만 해도 앞산엔 울창한 숲으로 푸름이 가득했다.
봄이면 푸름으로 갖가지 산나물을 주고, 여름이면 풍성한 녹음이 그늘을 주었다. 무더운 여름엔 시원한 바람을 건네주었고, 가을이면 무심한 듯이 툭하며 알밤 떨어지는 소리는 여기가 천국인가도 했다.
어느 날 전기톱 소리가 동네를 흔들었다. 깜짝 놀라 바라본 앞산엔 벌목꾼들이 나무를 베기 시작한 것이다. 오래된 나무를 베어내고 수종갱신을 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며칠 동안 나무를 베어 내고, 봄철에 이르러 작은 자작나무를 가득 심었다. 저렇게도 어린것이 언제 자랄까 의심했지만, 자연의 힘은 위대했다. 어린 나무를 심고 2년이 지나자 사람키만 큰 몸집을 불렸다. 바람 따라 살랑이며 하얀 잎의 앞뒤를 보여주며 눈길을 잡아 놓았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제초작업을 아침부터 시작한 것이다.
지난해부터 아내는 환상의 정원을 꿈꾸었다. 야트막한 앞산이 훤해졌으니 남의 산이지만 꽃을 심어보자는 심산이었다. 번식력이 강한 금계국으로 황금빛 앞산을 만들자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금계국이 꽃을 지우고 씨를 달았다. 영근 씨앗을 받아 앞산에 뿌리고, 수명을 다한 금계국을 뽑아 앞산 여기저기에 뿌려 놓았다. 봄이 찾아오자 여지없이 싹이 돋았고 봄이 익을 무렵 앞산의 희망대로 영글어갔다. 초봄에 애기똥풀이 여기저기에서 꽃을 피우더니 드디어 금계국이 꽃을 피웠다. 애기똥풀과 금계국, 여기에 개망초가 하양으로 어울리며 환상의 동산으로 변했다. 야, 천상의 화단이 별것이던가! 아내의 수고가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오늘, 환상의 정원이 위기를 맞은 것이다. 풀을 깎는 사람들이 몰려온 것이다. 한 사람의 인솔자와 풀을 깎는 사람들이 예초기를 메고 달려들었다. 어눌한 말소리가 틀림없는 동남아 어느 나라 사람들이다. 저 사람들은 꽃을 어떻게 볼까? 아름다운 꽃이니 그냥 둘까? 아니면 잡초에 불과하니 베어 버리고 말까? 가슴을 졸이던 현실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잡초로 보였던 그들의 눈은 어쩔 수 없었다. 오로지 아버지의 역할을 하기 위해 이 먼 나라로 온 사람들, 찌는 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산을 누비고 있다. 미리 부탁을 해볼까도 생각했지만, 괜히 일을 방해하는 것 같아 바라보기만 아침은 왠지 허전했다. 황금빛 정원은 흔적 없이 사라진 것이다.
아침이지만 무더위에 움직이기도 어려운 여름, 무거운 예초기를 메고 현실과 싸우고 있었다. 아버지의 역할을 위해, 가장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찾아온 이국땅이다. 비 오는 듯이 적신 옷소매가 애처롭다. 가장의 역할을 위해 이국땅에서 고군분투하는 그들, 앞과 뒤를 돌아볼 여유도 없나 보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사람들, 꽃이 눈에 들어올 리가 있다던가? 땀으로 젖어버린 옷이 처절하지만 건강한 모습이다. 어떻게 저런 힘이 나올 수 있을까? 나름대로의 꿈과 희망을 안고 찾아온 한국땅이다. 아내가 천상의 화원을 바라듯이, 저들도 더위속에 아름다운 꿈을 키우고 있는 것이었다. 사리진 화원의 서러움보단, 아비들의 넉넉한 몸놀림에 눈이 멀었다.
아내가 얼른 냉커피를 만들었다. 폭염 속엔 모진 노동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고 싶어서다. 10여 잔의 냉커피를 들고 산등성이를 오른다. 돌아보지도 않고 풀을 베는 그들이다. 베어낸 풀이 널려있는 산등성이를 커피를 들고 올라간다. 무더위를 무릅쓰고 가장의 역할을 위해 노력하는 동남아 사람들, 아내는 안타깝고도 애처로웠던 모양이다. 멀리서 바라보는 산에 노랑 금계국이 지워지고 작은 자작나무가 잎을 흔들고 있다. 자작나무 숲에는, 아비의 역할을 위해 비지땀을 흘리는 이국인과 이를 조금이라도 위로해 보려는 아내의 발걸음이 천상의 화원을 이루며 어우러지고 있는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