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불나방같은 젊음을 위하여

by writernoh

2021현재 세상은 미쳐버렸다.

난 그렇게 인식하고 디스토피아라고 규정했다.

절벽같은 세상에서 진리를 찾을 수 있을까.


헤세의 다른 작품인 데미안이나 싯다르타의 구도 프레임과 겹쳐지는 이 소설은

종종 종교적 고전에서 보여주는 구도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 일대기 영화처럼 보여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함께 떠오르는 것은

90년대 한국영화 '아제아제바라아제'에서 청하(강수연)이다. 그녀가 수행에 들고자 했으나 큰 스님은 한결같이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세속에 내쳐지며 어쩔 수 없이 승복을 벗은 그녀는 온갖 인간사의 고통을 겪어내며 도를 닦는다. 마치 헤세의 골드문트처럼.




어떻게 살 것인가


sticker sticker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고민하며 갈구하던 인간의 화두이다.

그러나 인간사의 무수한 사건사고를 직면하며

불협치와 개인의 이익이 난무하는 현대에 지치고 힘들어지면 돌아갈 안식처가 필요하나

막상 갈 곳이 없다.

자기만의 동굴을 만들어 동면이라도 하고나면 좀 힘이 생길 것도 같으나

갈 곳이 없는 이에게 영원한 안식의 고향은

어쩔 수 없이 인간 탄생의 근원 자궁이다.


모태는 나를 물 위에 둥둥 띄우고 몸을 어떻게 뒹굴든 나무라지도 않고 사기치지으며 안전하게 보호해 준다.

또한 탯줄이 공급해 주는 양분은 내가 질식할 정도로 밥벌이를 하지 않아도

있는그대로의 무한한 신뢰로 나를 채우고 성장시킨다.

얼마나 도피하고 싶은 아늑한 세상인가.

자궁밖으로 나와서도 잠시 빛의 세계에 적응하기 전

혼자 설 때까지 "엄마" 또는 그에 상응하는 존재가 양육하며

언덕이 되어 준다. 그 힘의 근원으로 지금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골드문트에게는 그 언덕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아직 소년인 그를 수도원 학교에 입학시키고 찾아오지 않았다. 아내가 남겨놓은 방랑벽이 아들에게도 유전될까 아예 그의 삶을 수도원에 가두어 놓은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을 거세당한 소년은 모성이 없는 남자들만의 규칙적인 세계에서 꿋꿋이 성장하나, 자신의 본질적 갈망에 부딪힐 때면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에게서 심겨진 부정적 모성을 벗어나며

아득한 꿈속에 어머니를 그리워 한다.


하지만 어린 골드문트는 혼자가 아니었다. 수도원에서 동료이자 스승인 나르치스를 만난 것은,

잠시였던 아버지라는 언덕의 위탁에서 벗어나 온전한 자기를 깨달아가는 인생길의 큰 지침이었다. 단지 멘토와 멘티라 하기에는 그들의 정신적 교류는 운명적인 것이었다. 더구나 나르치스는 골드문트를 북돋아 주나 그에게 동반자로서 수도자의 길을 거부한다. 철저한 수도의 길을 걷는 그는 아름다운 미소년에게 스며있는 다른 성소의 길을 보았던 것일까. 그점 만으로도 이미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의 자궁이 되었고 탁월한 경지에 이른 구도자였다.


골드문트는 어느 날 과제를 수행하다가 숲에서 잠이 든다. 그 때, 리제라는 육욕의 여인이 나타나고 그녀의 품에 안겨 수도사의 규칙을 위반하고 사랑을 알게 된다. 이제껏 알던 그 무엇과도 다른 여인과의 쾌락을 어머니 본질이라고 여기기나 한듯, 그 즉시 어떤 미련도 없이, 유일하게 나르치스에게만 이별을 고하고 속세로 긴 방랑을 떠난다.




방랑, 현실, 자유, 고귀함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이 개념이 실은 골드문트의 삶에서 공기처럼 부유하며

어머니의 모성을 갈망하는 아들이고, 삶과 죽음의 인간의 삶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고민하는 진리를 갈구하는 젊은이로서의 구도의 길처럼 보인다.


그의 유랑 생활은 자유롭다. 무책임한 듯 아무것도 연연해 하지 않는 소년은 잘생기고 영특한 외모로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는다. 라틴어와 희랍어에 능한 지식은 그를 뜨내기 집시와는 다른 매력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된다. 그러나 사람들과 엮이는 것은 잠시, 그를 온전히 받아주는 사람은 드물다. 단지 그의 외모와 능력만이 그들의 관심이었고 날이 저물고 겨울이 되면 갈곳없는 방랑자였다.

기사의 성에서 만난 뤼디아는 처음으로 육욕만이 아닌 진실한 사랑을 알게 하지만 방랑자는 그곳에서 가질 수 없는 사랑을 추구할 뿐이었다. 하지만 안락의 순간은 잠시뿐이고, 물던 젖을 놓친 아기처럼 허망하게 차가운 겨울 숲으로 내몰린다.



춥고 삭막한 떠돌이로 살며 우연히 시골 아낙네의 분만을 목도하고, 적나라한 자신의 근원을 바라보게 된다. 그간 길에서 만나 부둥켜 안았던 여인의 쾌락에 오른 얼굴빛과, 고통의 최상의 모습을 한 아이를 낳는 여인의 얼굴빛을 교차시키며 생의 고락을 발견한다.

산모 진통하며 일그러진 모습에서 추하기보다 태초의 어머니를 느끼며 신비스러움을 찾은 것이다. 자신도 이런 출산의 고통을 견디며 태어났고 인간의 근원이 이러할진데

어머니의 떠나버림에 대한 원망이 이제 다른 감정으로 승화되어 오히려 연민이 되는 순간 근원의 부재를 딛고 일어선다.


이후에도 그의 방랑은

더욱 적극적으로 자기의 결핍을 채우며

먹어치우듯 자유롭게 갈구하던 쾌락의 수유를 음미하

럴수록 자유의 고통을 배우고 굶주리고 헐벗으며 인간의 쾌락과 속됨을 본능적으로 익힌다.


모태를 벗어난 거친 숲의 배반은

심지어 살인까지 저지르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세상에 뒹구는 것으로 보이고

변해가는 골드문트의 타락을 보고 어쩌면 독자는 안타깝다고 느끼게 된다. 그의 고귀함이 사라지기 전에 정신의 고향인 나르치스만이 그를 구원해 줄 것이라 언제쯤 그가 등장할까 기대하게 된다.


고귀했던 소년이 방탕한 청년으로 변해갈 때 의심을 가지며 이렇게 살아도 될까 싶은 의혹이 이는 것은 우리 삶속의 개인인 방황하는 각자의

또는 그녀의 모습으로 이입된다.

진지하게 생을 고뇌하고 아파한 적이 있다면.

우리가 생의 한때 왜 그렇게 불나방처럼, 자유를 빙자한 오히려 무절제의 길을 걸었는지

이해할 수 없는 한때의 혼란을 겪는 것처럼 골드문트에게도 그런 시절이 지나간다.

-한번도 불나방이 되어보지 못한 삶은 그래서 뒤늦게 오춘기를 겪지 않을까, 아니면 나르치스처럼 속세를 떠난 수도중이거나! 아직 그마저도 없었다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속세에서 방탕의 삶이 여러 번 지나가고 드디어 -데미안의 싱클레어가 꿈을 통해 새의 형상을 만나고 데미안을 동경하듯-종지부를 찍는듯 보인다.

그러나 아직도 이 전환은 방랑의 중간에 이를 뿐이었다.

아직도 겪을 일이 많은 것인가!


인생의 변곡점, 터닝포인트는 찾아온다. 유랑 중 어느 도시의 주교좌 성당 앞에서 우연히 운명을 마주하게 된다.그곳 신비로운 조각상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으며 조각상의 장인을 찾아가 타인의 구도에까지 이를 예술을 배우게 된다.

얼핏 방황의 끝이었을까 싶으나 아직 그의 유랑은 끝나지 않았다.

이 시기는, 조각을 통해 수도를 잇는다. 이제껏 방랑의 수행으로 유년 시절 강제로 잊어야 했던 어머니를 향한 갈망에서 벗어나며 얻은 이상을 작품에 담는다.

이번 여정의 귀결은 어머니, 뤼디아를 가슴에 묻고 나르치스를 향한 동경을 이상으로 자리잡게 한다.


하지만 나르치스를 형상화한 사도요한의 조각을 완성하자 그의 방랑은 다시 고개를 든다. 예술로 승화되어 그의 구도를 완성시키나 싶었지만 그는 안주하지 못하고 다시 방랑의 삶을 택한다.스승의 선택을 뿌리치고 더욱 황량한 미래로 뛰어드는 것이다. 아직 무르익지 않은 청년의 객기는 안주하지 않고 거침없이 떠난다.




새로운 방랑에서 페스트라는 인류사 전체 비극중 가장 극심한 살육을 목격하고 그 불신과 두려움의 땅에서 여전히, 이제껏보다 더욱 사실적인 수행을 살아간다.

이그러져 죽어있는 감염자들의 시체와 대비되는 싱싱한 젊음과 육체를 탐하고

살아있는 존재의 극에 달한 양심의 이탈을 마주하며

영원한 방랑을 되풀이 한다.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시간은 흐르고 젊음은 머무르지 않는다. 여정은 함께한 사람을 잃기도 하며 페스트는 지나간다. 리고 다시 극에 달한 방탕한 순례자의 끝은 도덕을 벗어나 어떻게 인간이 바닥으로 추락하는가를 보게 된다. 고귀함은 잠시이다.


본능이 부르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 그녀는 권력자의 아내였고 세상을 압도하는 탐욕의 정상이었다. 골드문트는 그녀를 유혹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손을 벗어나 뒤통수를 때린다. 그녀와 간음을 하려다가 들켜 구차스런 도둑으로 변명하여 사형수가 된 절체절명의 상황, 이렇게 끝이나는구나 싶을 때,

그때 그의 옆을 필연적으로 지나가는 수도자는 나르치스였다.


나르치스는 그를 살리기 위해 권력자와 거래를 하고 골드문트는 죽음의 위기를 모면한다. 다시 수도원의 울타리에서 보호를 받으며 방탕한 청년의 삶을 마무리한다.




이제 나이든 조각가로서의 절정에 달하고 수많은 방황속에 얻은 영감으로 조각을 하는 그의 손은 장인이 되어 있었지만, 그를 평생 떠나지 않던 '어머니'로 부터 부여받은 방랑벽은 생의 마지막 방랑을 떠나게 한다.

그가 떠난 후 나르치스는 보게 된다.

어머니와 뤼디아를 형상화한 마리아상.

언제나 정신적인 면에서 자신이 우위를 차지했기에 골드문트를 보호하고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골드문트가 두고 떠난 조각상에서 예술작품의 의미를 깨달은 것이다.


골드문트의 방랑의 삶이 만든 작품이 이제껏 학문과 극기의 수련으로 쌓아온 자신의 학식과 명성 모든 것보다도 더 고귀하고 천상의 것과 가까웠음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골드문트는 이전에 아무것도 없이 떠났던 방랑과는 달리 수도원장이 된 나르치스의 도움으로 처음 자신이 왔을 때 아버지가 수도원에 주고간 점박이 말을 대신하듯,

한 마리를 얻었고 새 옷도 마련하여 수도원을 떠났다. 하지만 이내 어처구니 없게도 말에서 굴러 떨어져 수렁에 늑골이 부러진 채로 한참 쳐박힌 상태에서 드디어 삶의 의미를 바라본다.

그는 다시 아무것도 없는 신세가 되었다. 허무하기까지한 마지막 방랑에서 또다시 나르치스에게 돌아온 골드문트는 얼마 후 마지막 말을 남기고 영원히 친구를 떠난다.


그런데 나르치스, 자네는 나중에 어떻게 죽음을 맞아할 것인가?
자네한테는 어머니도 없잖아? 어머니가 없이는 사랑을 할 수 없는 법일세.
어머니가 안계시면 죽을 수도 없어.


골드문트가 말한 어머니란 어떤 의미였을까...구도의 길잡이로서 인생 순례자인 당신의 지침을 갈구해 보시길!




우리가 삶에 지친 어느 순간,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절망할 때 문뜩,

그간 먼지와도 같던 자신을 너무 과대포장하여

가치를 평가절상하여 고귀한 타인보다 높이 여겼던 자만의 수렁에서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 깨달을 때

그제서야 비로소 자기의 우물을 벗어나 세상을 알아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절망으로부터 겸손히 물러나며

생의 가치를 받아들인 다면 당신의 구도는 어느 정도 진리를 얻지 않을까.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이 이야기를 떠올리며

세속을 벗어난 절대 경건의 지위를 누리는 삶도 있고,

세상에서 탐욕스럽게 굴려가며 본성의 삶을 다하고 났을 때의 삶이 있으나

그 중심에 깃든 영혼의 무게를

어느 것을 더 속되고 경건하다 말할 수 있을까 헤아려 본다.


잠시 디스토피아를 방황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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