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훈 광장

다시 읽는 광장에서 혼돈을 정리하다

by writernoh


2021년 6월. 초여름 비는 대지를 온통 안개에 휩쓸어 뿌연 회색으로 감추어버린다. 당신이 연결된 사회는 어디인가? 어쩌면 이제껏 당신은 밀실 속에 갇혀 한발 내딛지 못하고 숨도 한번 맘껏 쉬어보지 못한 끈 떨어진 개인일 뿐인가. 사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라는 것은 핑계일 뿐 세상은 이전부터 점점 뿌리를 내딛지 못하는 레드오션으로 저만치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 때나 손만 뻗치면 접속하는 인터넷 연결망이 지겹도록 단순하고 속물적인 근성을 내보이며 한시라도 ‘따라가시오, 돈을 쓰시오, 그리고 만족하시오.’ 하고 최면을 걸어대는 좀비 같은 배너의 홍수 속에 진짜 사람을 만나고 싶은 갈망이 당신은 간절할지도 모른다. 시대를 초월하여 혼돈의 삶 속에 피어나는 역사에서 블루오션을 만날 수 있다는 풀뿌리를 지키기 위해 나는 오늘 ‘광장’에 대해 이야기한다.




시간을 거슬러 70년 전으로 되돌아가 보자. 그 시절, 세상을 냉각시키던 이념 사회에서 청년 이명준의 얼굴을 한 작가 최인훈은 갈망한다.


사람인 줄 알고 말을 건네려고 다가가면, 깎아 놓은 장승이었다. 진짜 사람을 만나야 했다.


매운 계절은 느끼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일까. 굳이 철학적 관념의 달걀 껍데기를 쓰지 않아도, 너무 쉽게 위선과 가식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어느 세대이든 살아남기 힘든 것이다. 눈 딱 감고 넘겨주지 못하는 세상을 그가 너무 맑고 순수한 사람이어서라고 하기에는 지구는 늘 오염에 가득 차 불순해져 있었으며 그 속에 개인도 온전치 않아서일 것이다.


1950년대 대한민국 현대사도 오염에 차 있었다. 청년 이명준이 생각하는 당시 대한민국은 이런 곳이다.


남한의 정치판은 미군부대 찌꺼기로 서양 문화주택을 짓고 사는 브로커의 무리들이 판을 치는 곳. 한국 정치 광장은 똥오줌 쓰레기로 가득하다. 하지만 어느 세대이든 인간은 그 자신의 밀실에서만 살 수 없다. 인간은 광장과 이어지고 정치는 인간 광장의 제일 거친 곳이니 잠시 머뭇거린다. 어쩔 수 없이 발을 내딛어 그 모양을 살아내기가 괴로운 것이다.


정치인들은 거리의 꽃을 꺾어 자기 정원을 가꾸고 광장에 나와 자루와 도끼와 삽을 들고 눈에는 마스크를 가리고 사회를 도둑질한다. 누군가 광장에 나와 그것을 말리면 사주된 갱들이 나타나 그들을 해치우고 갱은 그렇게 받은 돈으로 정조를 산다. 피 흘린 스산한 광장에 검은 해가 뜨더니 핏빛으로 물들어 빌딩 너머로 떨어진다. 정치는 그 시대 사람들의 삶, 광장은 추악한 밤으로 덮이고, 탐욕과 배신, 그리고 살인이 벌어진다.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양심의 자물쇠를 여는 시민들은 도둑이 터 잡고 장사하는 경제의 광장에서 피 묻은 물건을 사고 그렇게 한 푼 두 푼 모아 가계를 늘린다. 한국 경제의 광장에서는 사기의 안갯속에 협박의 꽃불이 터지고 허영의 광고 풍선이 하늘을 떠돈다.


문화의 광장은 헛소리의 꽃이 만발했다. 비평가들은 한국산 카프카를 망가트리고 타협된 청년은 광장의 어둠에 몸을 맡기고 줄을 타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눈을 가진 청년은 좌절한다. 광장은 불신의 마당으로 전락한다. 하지만 시민은 정의보다 실리의 식량을 구하기 위해 광장에 발을 들인다. 뒤돌아 진실의 시간, 껍데기 속으로 숨어드는 그들이 가장 아끼는 것은 자기의 방 밀실뿐이다.

이러한 정치 사회관을 가진 청년 명준의 관념은 철학자로부터라기 보다 너무도 독립적으로 홀로서야했던 가족바탕에서 영향받았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타국을 떠돌이 생활하게 한 아버지는 급기야 8.15 해방이 되자 월북하고 어머니는 바로 사망했다. 그는 일찍이 자기만의 방에 혼자 존재했다. 아버지의 광장은 막혔고 태초에 그 광장은 믿은 적이 없다. 어린 명준은 살아야 했고 스스로 탐색해야 했다. 부모는 사상적 씨앗을 배태시키기보다 시대의 어려움만 인식시키고 명준의 운명은 스스로의 힘으로 타고난 사색가로서 자기 색을 찾아가고 있었다. 이미 그들은 명준과 무관했다.

혼자 살기 어린 나이는 아니지만 명준에게 그래도 기댈 곳이 생겼다. 이것이 부성의 끈일까. 은행장을 하는 아버지 친구 집에 몸을 의탁하게 된 것이다. 철이 없던 걸까. 명준은 그 집에서 용돈도 생활비도 아무 걱정 없이 학업에만 몰두했다. 가끔 그 집 자녀 태식과 영미 남매가 흥청망청 파티를 즐기며 부르주아의 속물처럼 살아갈 때 명준은 한 발 뒤에서 사색을 하며 밖으로 나와 나이 든 학자와 소통하며 지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월북한 아버지가 북한 대남 방송에 나왔고 경찰은 명준을 소환한다. 취조를 받다가 폭력적인 경찰에 공포를 느끼는 명준은 이제껏 자신이 어떤 토양에서 살고 있는 처지인지 생각지 못하고 지냈음을 깨닫는다. 당시의 월북가족은 주시 대상이었고 연좌제의 그물은 어디에든 따라다녔다. 취조실에 앉아 빨갱이로 취급받으며 발길질당하고 국가의 대리인에 의한 피를 흘릴 때 명준의 처음 공포는 사라지고 오히려 불길이 일었다. 불은 피를 흘리며 자신을 태운다. 탈대로 타고 난 무서움의 잿더미에 미움의 찬 비가 소리 없이 내려 남은 재를 고스란히 적신다. 사무치는 미움이 온몸에 스며든다. 민주주의 시민은 법률 밖에 있고 경찰은 피 흘린 시민을 그대로 내보내도 욕먹을 것이 없는 시대이다. 검은 힘에 기댄 경찰은 시민의 눈을 겁내지 않았고 오히려 시민을 겁박한다. 광복 이후 자유는 이제 명준의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밀실에 함부로 들어와 짓밟은 불한당 법률, 국가에 무너지는 남한사회의 초라한 자신은 아끼던 것들이 허물어져가는 소리를 온몸으로 듣고 있는 것이다. 한때 광장을 꿈꾸며 뿌듯한 보람을 품고 살고 싶었던 이명준은 남한이라는 광장에 설 수 있을까.


남한의 극우 정치 현실에 분개를 하나, 아무도 손잡아 주지 않는다. 어디에도 정처를 둘 수 없던 명준은 갑자기 떠난다. 영미의 파티에 와 두어 번 교제한 윤애를 찾아 인천항으로 오토바이를 몬다. 선창을 함께 걸으며 마음의 길에 다가서고자 하지만 헛된 바람일 뿐이다. 갈증을 풀지 못하고 하늘을 본다. 그때 구름 사이 반짝이는 흰 무엇을 발견한다. 유영하는 갈매기다! 날개를 기울이며 내려 꽂히고, 때로 번듯하게 뒤척이며 스르르 미끄러지는 폼이 노곤한 한 폭의 그림이다. 생을 부유하는 명준 자신일지도! 하지만 그 항구에서 결코 도도한 윤애의 마음에 자신을 매어둘 수도 없음을 확인하며 항구 선장의 우연한 월북 제의에 응해버린다.


월북한 명준은 색도 향도 없는 공산주의자들을 본다. 민주주의 민족 통일전선 중앙 선전 책임자인 부친은 일류 코뮤니스트 혁명가가 아닌 중류 부르주아나 다름없다. 북한도 속된 권력의 사회였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새어머니가 만드는 가부장적 가정의 모습은 그가 월북하며 바라 왔던 혁명의 정의로운 세상이 아니었다. 일제 지주의 소작인이던 인민은 공산화된 땅에서 당의 소작인으로 역할을 갈아치우고 마지못해 노동을 하고 있었다. 인민공화국이 잘 되고 있다는 소문만 있지 정작 자기 주변의 삶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북조선 인민에게는 주체적인 혁명 체험이 없었다는 것이 비극이다. 그들은 소련의 지령으로 공산화가 되었다. 헛것을 섬기고 푸닥거리에 기대어 무쇠 같은 멍에를 지고 사는 곳이다. 북의 광장에는 꼭두각시뿐 사람은 없었다. 남쪽의 광장도 자본의 꼭두각시, 권력의 나팔수로 허영과 질투 그리고 폭력의 벽이 있을 뿐 사람을 만날 광장은 찾을 수 없었다. 남이나 북이나 속된 권력은 정체성을 잃고 도구로 전락해가는 모양에 실망하는 현실을 마주한다. 그는 또다시 아버지를 떠나 혼자가 된다.


홀로서기를 시작한 명준은 정신의 혼돈을 가다잡기 위해 극장 건설 노무자로 잠시 일한다. 그런데 작업 중 부상을 당해 병원에 입원하게 되며 국립극단 무용수들의 방문을 받는다. 자신들의 무대를 짓기 위한 일꾼이 부상을 당해, 하나의 공동체로서 그를 당연히 위문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의리일까. 물론 당의 지시였겠지만. 명준은 전화위복으로 그 발레단원 중에 은혜를 만나고 그녀의 생명력을 통해 새로운 도약으로 삶에 대한 애착을 갖는다. 북에서의 일원으로 당당한 사회 구성원이 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구태를 벗어나려는 시도로 기자로서의 사실적 보도를 주장하다가 당의 눈에 나 꼴호즈에 파견된다. 그곳 현장 보고를 맡은 그는 여전히 진실의 눈으로 현장을 바라본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한 꼴호즈의 솔직한 보고서가 다시 그의 발목을 잡는다. 당은 사실을 보고할 뿐 당을 선전하지 않는 그에게 자아비판을 시킨다. 명준은 당을 미화하기 위한 펜을 잡을 수 없어 다시 이방인이 된다.

결국 전쟁의 포화 속 인민군이 되어 남쪽 수용소에 갇히고 광장은 망연자실 정체성은 축소된다. 포로수용소에 갇혀 석방을 기다리며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의 딜레마에 발이 묶인다. 은혜라도 있었다면! 그러나 지금 그에게 아무것도 없다. 남과 북의 현실을 살아 본 그는 남쪽에서 윤애와의 사랑으로 광장으로 가는 길을 찾았으나 실패했고 그것을 딛고 북으로 왔다. 북에서 자신을 받아주는 윤혜와 새로운 삶을 살아보려 했으나 그녀는 당보다도 명준을 사랑했다. 하지만 발레도 그만두고 명준을 쫓아 간호병으로 전쟁에 참가했으나 명준의 아이를 가진 채 전사하고 말았다. 이제 그에게 갈 곳은 어디인가. 청년 이명준의 시도와 노력은 그를 광장으로 나아가 소리치게 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아니면 그의 밀실이 너무도 견고했던가.




작가는 말한다. 역사는 소걸음으로 움직인다. 슬기는 슬픔과 기쁨을 고루 나누는 것이다. 사람이 이루어 놓은 것에 눈을 두지 않고 이루어야 할 것에만 눈을 돌리면 그 자리에서 그는 삶의 힘을 잃는다. 은혜의 죽음은 명준에게 마지막 돛대가 부러진 것이다. 결국 세상에서 난파된 명준은 항구를 잊고 물결에 흘러 다니며 환상 없는 섬을 찾아 지친 몸이 수명을 다하다가 떠나기 위해 중립국을 선택한다. 거기에서 가장 작은 시민으로 조용히 살기를 희망했다.

타고르호를 타고 떠나는 명준에게 환영이 따라다닌다. 얼굴이 없는 눈. 누군가 그를 감시하는가? 정신적 부채가 혼을 끌고 다니는 것일까? 제 나라를 버리고 쫓기는 수난자를 인도인 선장은 환대한다. 그러면서 따라오는 갈매기는 죽은 사람의 넋일 거라고 또는 뱃사람을 잊지 못하는 여자의 마음일 거라고 농담을 한다. 하지만 그때부터 명준에게 갈매기는 환영일 뿐이고 떠나온 곳의 여인으로 자리 잡는다. 배 마스트에 걸린 흰 댕기는 그녀들을 기억하게 하고 댕기의 대리품인 새는 못다 펼친 인생과 사랑에 대한 광장을 떠다니는 환영의 표상이 되었다.


마지막 날, 갑판 모퉁이를 돌면 아무 꾸밈도 없는 민숭한 곳이 나온다. 약한 자가 숨는 곳, 최후의 밀실이다. 하얗게 햇빛이 눈부신 작은 놀이터. 아무리 초라해도 저 혼자 쓰는 곳에 선다. 그는 광장 없이 숨을 돌리지 못하는 버릇을 못 고쳤다. 광장에서 졌을 때 사람들은 밀실로 물러간다. 자꾸 보였던 그림자가 드러난다. 배에 내려앉은 흰 갈매기 그리고 그 옆에 작은 갈매기 그들은 밀실의 동거인이었다.


‘나’라는 자아는 개인뿐 아니라 자신이 속한 사회와 나라 등 집단의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는다. 개인은 자기가 속한 집단에서 적절한 기대와 의무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지금의 그는 개인 단독으로 형성되었다고만 볼 수는 없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담론 속에서 자기를 이해하는 것은 일개 부분에 불과한 개인의 의미가 아니라 속한 토양의 뿌리를 딛고 성장하여 사는 자신의 근원에 대한 고찰 무대이고 무대는 그 사회 광장이다. 그러므로 국가라는 공동체 일원으로서, 국가가 현재나 과거에 어떠한 역사로 흘러왔는지는 지금의 당신과 매우 밀접한 관련성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그 역사 속에는 지금의 당신이 떠안아야 할 부채, 도덕적 책임도 있고 그러한 인식의 출발로 공동체 된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마이클 샌들/정의란 무엇인가 참고) 조상의 음덕과 함께 부채를 떠안는 게 땅에 운명적으로 속한 사람들의 현실이므로 생의 기쁨과 고통이 그 안에서 어우러진다. 하지만 역사의 무게를 벗고 개인의 삶만 정진할 수 없을까? 그러기에는 당신이 밟아야 할 땅의 아픔이 너무 깊다.




‘광장’은 해방 이후 6.25 전쟁까지 남북 분단 상황 속에서 남과 북을 오가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했던 청년의 이야기이다.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민족의 분단 앞에서 무엇을 중심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특유의 철학적 고찰을 하고 싶었으나 현실은 그를 서로 다른 측의 이방인으로 거리를 두고 진정한 삶과는 선을 그었다. 권력과 폭력의 역사에 그늘진 이념은 어디에도 설 땅을 내어주지 않았다. 폭력의 그늘에서 이명준 스스로도 근간을 잡지 못하는 혼돈 속 판단의 근거를 짚어가다 결국 남북 분단이라는 현실은 경계에 선 한 사람을 안정된 사회인으로 머무를 수 없게 한다. 전쟁을 겪으며 포로가 된 그가 중립국을 택하는 과정 속 무엇이 선택에 영향을 주었는지를 살펴보자. 비단 이명준뿐 아니라 우리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삶의 단계에서 밀실과 광장을 넘나들며 사회인으로 살아야 하는 까닭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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