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어릴 적 동네에 동사무소는 나에게 그저 스쳐 지나치는 곳이었다.
어른들이 오가고 입구엔 공고문이 붙어있어 지난 그 공간이 어떤 일을 하는지 왜 필요한지 몰랐다.
내게는 단지 어른들의 세계 속 어딘가, 별 감정도 없이 존재하는 그런 장소였다.
그러던 어느 날, 고등학생 되어 주민등록증을 받으러 간 날.
사진을 들고 지문을 찍고 서명을 했다.
창구 너머 직원은 나에게 “이제 성인이 되셨네요.”라고 하는 것 같았다.
이때 비로소 동사무소라는 공간이 내 삶의 공식적인 출발점처럼 느껴졌다.
그전 까지는 무심하게 지나쳤던 장소가 이제는 내가 직접 들어가 이름을 등록하고 지문을 남기는 공간이 되었다.
대학교에 진학한 이후, 나는 동사무소를 제법 자주 찾았다.
학교 행정, 장학금 신청, 주소 변경, 아르바이트 서류 준비 등 등본이나 초본이 필요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무렵부터 주민자치센터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기 시작하였다.
동사무소보다 조금 더 부드럽고 친근한 이름이었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서면 분위기는 여전히 조용하고 딱딱했다.
입구에는 번호표를 뽑는 기계가 생겼고 전광판 아래, 사람들은 조용히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공간은 밝고 단정했지만 직원과 마주 앉아 서류를 주고받을 때면 어쩐지 긴장되는 기분은 여전했다.
필요한 일을 끝내고 금방 나오는 곳
자주 가지만 오래 머물지 않는 공간이라는 인상이 강하였다.
2010년대 들어 동네의 주민센터는 하나둘 새로 지어지거나 리모델링되기 시작하였다.
유리 외벽에 자동문, 엘리베이터, 지하주차장까지 갖춘 세련된 공공건물이 동네 한복판에 자리 잡았다.
이제 그곳은 단순히 민원만 처리하는 곳이 아니었다.
작은 도서관, 건강 프로그램, 커뮤니티 강좌, 전시공간 등 주민들을 위한 다양한 기능이 생겨났다.
아파트 게시판에는 ‘요가 교실’, ‘스마트폰 활용법’, ‘생활법률 강좌’ 같은 안 내지가 붙었고 복도에서는 아이들의 그림이 전시되기도 하였다,
어르신들은 더위를 피해 신문을 읽고 가끔은 플리마켓이 열리기도 하였다.
나는 등초본을 발급받으러 갔다가 문득 발길을 멈춰 아이들 그림을 바라봤던 기억이 있다.
행정은 온라인으로 넘어가고 공간은 삶의 거점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주민센터보다 행정복지센터라는 이름이 익숙하다.
민원 업무는 대부분 온라인 또는 무인발급기로 끝내고 직원과 말을 섞을 일도 거의 없어졌다.
공간은 여전히 잘 정리되어 있고 안내판과 게시물도 보기 좋게 배치되어 있다.
아파트 게시판에는 주민센터 프로그램이 여전히 자주 붙는다.
한 번쯤 참여해 볼까 하는 생각이 있지만 실천해본 적은 없다.
선거철이 되면 행정복지센터 강당은 사전투표소로 바뀐다. 줄을 서고 안내를 따라 들어가 기표를 한다.
그곳은 어느새 사람들의 정치적 참여의 장소로 되어 있다.
예전에 낯설기만 했던 그 공간이 이제 익숙한 절차와 풍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곳이 되었다.
동사무소는 이제 더 이상 무서운 곳이 아니다.
이름도, 구조도, 역할도 바뀌었고 이용자의 생활에 맞게 조금씩 진화하였다.
나는 여전히 그곳에 오래 머물러 있지는 않지만 어딘가 익숙해졌고 내 마음도 조금씩 거리를 좁혀가고 있다.
어쩌면 생활환경이란 이렇게 천천히 가까워지는 공간 속에서 자유롭게 멈출 수 있는 곳이 아닐까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공간이 있나요? 혹은 익숙해지는 중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