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내가 기억하는 집은 5층짜리 계단식 아파트였다.
엘리베이터는 없었고 매일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계단은 단순히 이동통로가 아니라 놀이터였고 윗집 친구들과 만나던 공간이었다.
복도에서는 김치, 된장찌개 냄새로 저녁 반찬을 알 수 있었고 가끔 현관 앞에 놓인 고무대야 등이 이웃집의 일상을 알려주고는 했다.
이웃은 그저 옆집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였다.
말을 하지 않아도 눈으로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주거 공간은 수직적이라기보다 수평적 감각이 강했고 그 안에서 일상, 온기, 불편함마저도 공유되었다.
1990년대 들어서며 주택 보급 정책에 따라 10층 이상 중층 아파트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나는 이 시기 15층 아파트로 이사하였다.
처음 타본 엘리베이터는 낯설었지만 곧 익숙해졌다.
계단을 오르내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렇게 편한 일이었구나 싶었다.
계단이나 계단참에서 수박을 나누어 먹는 풍경은 사라졌지만 집에 엄마가 계시지 않거나 열쇠가 없을 때 옆집이나 아랫집에서 대기하거나 밥을 얻어먹기는 하였다.
동네에 교회를 함께 다니는 사람들이 이웃인 경우가 있어서 엘리베이터에서 인사를 하고 서로의 사정을 아는 편에 속하였다.
당시 공간의 분위기는 수직적이라기보다 수평적 감각이 더 강한 느낌이었다.
2000년대,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바뀌었다.
20층, 30층을 넘어서는 고층 아파트들이 서울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줄지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이제 땅에서 올려다보는 것보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이 되었다.
단지 안에는 상가 내 마트와 편의점, 커뮤니티 공간이 들어섰고 지하 2~3층까지 이어지는 주차장은 지하도시와 같았다.
나는 이 시기 고층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실질적으로 체험하였다.
아파트는 높아졌지만 이웃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고개를 숙이고 침묵하였다.
각 세대는 철제 현관문과 출입문 통제 안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공고히 하였다.
2010년대에 이르러 40층을 넘는 초고층 아파트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서울 강남권, 역세권, 신도시 주요 지역에서는 60층에 가까운 고급 주상복합 단지가 빠르게 늘어났다.
나는 이 시기 직접 초고층 아파트에 살지는 않았지만 친지의 집을 방문하며 그 분위기를 체험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아파트들을 멀리서,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바라보았다.
유리 커튼월로 둘러싸인 외관은 반짝였고 경비는 삼엄했으며 출입구는 고급호텔처럼 조용하고 정돈되어 있었다.
창 밖으로는 주변 지역이 내려다보였고 거실은 넓고 밝았다.
마치 높이가 삶의 계층, 계급, 브랜드를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먼가 허전하였다.
사림의 기척보다는 시스템, 편의가 관계, 교류의 공간을 차지한 느낌이었다.
나는 지금 10층 이상 중층 아파트에 살고 있다.
초고층은 아니지만 땅에 가까우며 고요하고 안정감 있는 공간이다.
엘리베이터는 평범하고 창 밖으로는 멀리 제법 자란 나무와 하늘이 보이다.
가끔 이웃과 마주치면 가볍게 눈을 마주치고 인사를 건넨다.
이 집은 나에게 마음이 편안한 곳이다.
소란스럽지 않고 너무 고립되지도 않은 중간이며, 나만의 방식대로 살아가기 좋은 환경이다.
이제는 삶의 방식에 맞는 높이와 공간을 고르게 되었음을 느낀다.
아파트는 단순히 주거공간이 아닙니다.
그 높이에는 시대의 가치관이 담기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 밀도와 거리감을 포함합니다.
나는 지금 중층 아파트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적절한 높이, 적당한 거리, 조용한 생활.
이 공간은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삶과 방향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아파트의 높이는 단지 건축적 수치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삶을 원하는지 보여주는 선택의 지표이자, 사람들의 공간을 통해 맺는 관계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지금 몇 층에 살고 있나요? 그 높이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