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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도로 공간

by 리박 팔사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1. 이전보다 낮아진 속도


예전부터 자동차들은 아파트 도로에서 마음껏 달렸다.

과속방지턱이 있어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어른들이 “차 조심해!”라고 말했지만 차에게 “사람을 조심하라”라고 말하는 일은 드물었다.

어느 날, ‘5030 정책’이라는 단어가 뉴스에서 흘러나왔다.

도시의 간선도로는 시속 50km, 이면도로는 시속 30km로 제한한다는 정책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도로에서 난폭 운전이 줄어들었음을 느꼈다.

과속 차량이 눈에 띄게 줄었고 횡단보도 앞에서 멈추던 차들은 정지선 앞에서 멈췄다.

길을 건너는 내 발걸음도 그만큼 느긋해졌다.

사람을 우선하는 도로 문화, 그 변화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2. 아파트 도로 20km 제한


시간이 지나면서 아파트 단지 안 도로에도 ‘20’이라는 숫자가 바닥에 칠해지거나 표지판으로 세워졌다.

나는 그 숫자를 보며 ‘우리 단지도 이제 도시정책을 따르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달라진 건 운전자들의 태도였다.

예전엔 단지 안에서도 속도를 높이며 지나가던 차들이 이젠 마치 주변을 살피는 사람처럼 움직였다.

아이들이 킥보드를 타고 어르신이 천천히 걷고, 그 사이를 조심스럽게 지나가는 차량들.

도로가 차의 것만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라는 말이 비로소 실현되는 느낌이었다.

단지 안의 도로는 속도를 낮추자 모두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3. 전기차 구역


모퉁이 한쪽, 늘 어둡고 조용하던 주차장 자리에

어느 날 푸른색의 라인과 함께 EV ZONE이라는 글자가 칠해졌다.

그 옆에는 낯선 기계가 설치되어 있었고

며칠 뒤, 그 자리에 조용한 전기차 한 대가 충전 중이었다.

처음엔 그런 모습이 어색했지만 이내 익숙해졌다.

엔진 소리도, 배기 냄새도 없고 무언가 미래적인 분위기가 공간에 스며들었다.

단순히 세워두는 곳이었던 주차장이 이제는 에너지를 충전하는 장소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그 작은 변화가 어느새 우리 아파트 단지의 일상이 되어있었다.


4. 학원차 지정 구역


우리 아파트 입구에는 늘 학원차들이 아무 데나 서있었다.

경적 소리 뒤엉킨 차량들, 급히 뛰어가는 아이들, 아이들 이름을 다급히 부르는 목소리.


그러던 어느 날

바닥에 노란선이 그어지고 그 위에 ‘학원차 승하차 구역’이라는 글씨가 등장했다.


며칠 후부터 차량들은 그 구역 안에서 차례로 줄을 서기 시작했다.

아이들도 스스로 줄을 섰고 운전자들은 시간을 맞춰 조용히 대기하였다.


규칙이 생기자 공간이 안정되었고 사람들의 표정도 한결 편안해졌다.

사람들 사이에 생긴 작은 약속 하나가 도로 위 풍경을 바꾼다는 걸 눈으로 본 순간이었다.


5. 결론: 다정한 길 위의 변화


아파트 단지 안 도로는 넓지 않고, 특별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 위에선 속도는 줄었고 사람은 늘었고 에너지는 바뀌었으며 질서는 생겼다.


변화는 한순간에 일어나지 않았다.

표지판 하나, 노면 표시 하나, 충전기 하나가 생활의 방식과 감각을 조금씩 바꾸어 놓았다.


나는 여전히 그 길을 걸으면서 멈추고 종종 바라보며

변화에 적응해가고 있다.


그 길이 지금보다 더 조용하고 더 안전하고 더 다정하길 바란다.

그리고 그 길을 걷는 우리가 조금 더 천천히, 서로를 배려하며 함께 가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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