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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공간

by 리박 팔사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1. 기억 속 화장실


어릴 적 친할머니 댁 화장실은 마당 끝에 있었다.

흙바닥을 지나 삐걱대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안은 어둡고 축축했고, 냄새는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푸세식이었던 그곳에서 나는 바닥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방 안에서 요강을 더 자주 쓰려했지만 그것도 오래가진 못했다.

화장실은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고 가야만 하는 공간이었다.

나에게는 늘 두렵고, 빨리 빠져나오고 싶은 곳이었다.


2. 학교 화장실


초등학교 화장실은 낡은 타일과 얼룩진 세면대가 먼저 떠오른다.

문이 고장 났거나 물이 내려가지 않을 땐,

조용히 다른 층으로 이동하곤 했다.

볼일을 보며 들릴까 봐 일부러 소리를 냈던 습관

그건 누구에게나 들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화장실은 분명 기능적인 공간이지만

개인의 감정을 담기에는 다소 부족한 공간이었다.


3. 점점 바뀌는 화장실


도서관, 대학교, 백화점 등 공공시설을 다니면서

언젠가부터 화장실은 깨끗하고 밝은 공간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비데가 달린 양변기, 가방걸이, 음악이 흐르는 공간까지

예전의 삭막한 분위기는 조금씩 사라졌다.

하지만 한 가지 눈에 띄는 건,

남성 화장실은 비교적 여유롭지만 여성 화장실 앞은 항상 길게 줄이 서 있다는 점이었다.

그 차이를 인식하고 개선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이제 화장실은 위생뿐 아니라 젠더 감각과 배려의 기준이 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아갔다.


4. 모두를 위한 화장실


2000년대 후반부터 화장실에는 서로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가 하나씩 더해졌다.

기저귀를 갈 수 있는 평상, 낮은 세면대, 휠체어도 들어갈 수 있는 넓은 칸.

아이와 함께 들어간 아빠를 위한 공간도 생겼고

자동문과 손잡이, 경사로도 갖추기 시작하였다.


화장실은 누구든 불편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건 단순히 기술의 발전이라기보다

사람을 더 생각하고 다양성을 인정하게 된 변화였다.


가끔 “내가 이 칸을 써도 될까?” 하고 망설인 적도 있지만

그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도시가 따뜻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를 조용히 배려해 주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큰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5. 결론: 가장 사적이고 가장 사회적인 공간


얼마 전 본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서는

도쿄 공중화장실을 청소하는 남자가 등장한다.

반복되는 청소, 나무 그림자, 고요한 틈, 도쿄의 하루

영화는 말없이 보여준다.


화장실이라는 조용한 공간이

얼마나 섬세한 감정과 삶의 결을 담고 있는지


그 장면을 보며 문득 내 기억이 떠올랐다.

어두운 푸세식 화장실부터 자동문이 열리고 음악이 흐르는 지금의 화장실 까지


화장실은 잠깐 머무는 공간이지만 그 안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공간을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말해주는 지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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