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by 리박 팔사

이것이 도시계획이 원한 삶이었을까?


나는 도시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부모님이 선택했고 나는 따라갔습니다.

1992년,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우리는 외곽의 새 아파트 단지로 이사했습니다.


그 동네에는 신기한 게 많았습니다.

급하게 입주한 탓에 아파트만 덩그러니 섬처럼 있었고 그 외 도시기반시설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채 사람이 먼저 들어왔습니다.

학교는 한 반에 80명이 넘게 앉아 있었고 도로는 아직 흙바닥이었습니다.


그때는 어려서 도시계획 같은 단어의 뜻도 몰랐다.

당시 아파트 단지는 거의 비슷하게 생긴 평면이었고 이웃들은 비슷한 옷차림과 말투, 생활리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공무원, 교사, 은행원, 공장 사장님, 경찰 아저씨까지 다정한 분들이라 모르겠지만 확실히 비슷한 사람들이 함께 사는 분위기였습니다.


단지 내 상가는 말 그대로 작은 시장이었습니다.

문방구에서 만화책을 샀고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먹고, 이발소, 학원, 교회, 미용실, 슈퍼마켓 등이 모여 있었습니다. 굳이 동네 밖의 재래시장으로 나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지방자치의 첫 세대이기도 했습니다.

1995년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우리 아파트 단지에 구청장 후보가 살았고 아파트 입구에서 선거가 뭔지도 잘 모르면서 그 후보를 응원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지방자치라는 제도의 시작이었고 민주주의가 생활 속에 들어오는 순간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1997년 IMF가 찾아왔습니다.

그때부터 단지나 학교가 좀 조용해졌습니다.

윗집 아저씨의 직장인 은행은 없어졌다고 했고, 아는 형네는 이사를 갑자기 갔습니다.

각자의 사정이 있나 보다 정도로 이해했지만 사실 그때부터 신도시의 균열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년이 된 이후 나는 대학교에서 도시건축학을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도시를 설계하고 해석하는 법을 배우면서 ‘내가 자란 곳은 누가, 왜, 어떻게 만든 것인가’를 처음으로 생각해 봤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아파트 단지나 신도시에 대한 문제제기나 고민은 없었습니다.

다만 서울 도심 광장에서 사람들이 억울한 일이 있을 때 1인 시위, 촛불 시위 등을 봤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도시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모습이라고 느꼈습니다.

계획된 공간만이 아니라 말할 수 있는 공간.

이전까지 내가 경험한 도시는 너무 질서 있고 조용했습니다.


그때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주거나 공간에 관한 정체성이 계획된 도시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1기 신도시 이후 2기 신도시가 등장하고 주변에 거대한 개발과 재건축이 주변에 들어설 때, 1기 신도시 사람들의 삶도 더욱 흔들렸습니다.


같은 도시, 건축, 주거에 살고 있지만 다른 삶을 살거나 공간과 환경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리모델링, 낡은 집, 전세, 반전세, 자가, 오래된 거주자, 유입된 세대 등 똑같은 평면 안에서 도시의 다양성이 형성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결혼을 하였고 중심시가지 재건축 아파트에서 신혼 생활을 하였지만 이전보다 낯섦을 느꼈습니다.

아이가 생기고 다시 돌아온 곳은 부모가 사는 1기 신도시였습니다.

이제는 내 아이를 키우면서 도시를 다시 경험하고 있습니다.

놀이터, 어린이집, 초등학교, 하천변, 운동장 등

예전에는 지나쳤던 도시구조가 이제는 내 정체성의 토대가 되었음을 느꼈습니다.


나는 이웃들에게 인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공간이 아니라 관계도 도시를 만든다는 사실을 이제야 조금씩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신도시라는 계획된 구조 속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고 살고 있는지를 느끼고 기록하고자 합니다.

산업화, 민주화 이후 신도시는 지역민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요? 공간과 삶은 어떻게 얽혀 왔을까요?등이 주요한 질문입니다.


이 글은 나의 이야기이자, 계획된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도시계획은 공간을 제공했지만 그 공간 안에서의 삶까지는 결코 계획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의 몫이고 책임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묻고 싶습니다.

“이것이 도시계획이 원한 삶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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