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도시계획이 원했던 삶이었을까?
처음 이사 온 신도시에는 전봇대가 없었습니다.
다른 동네인 친척 집에 놀러 가면 전선이 복잡하게 얽힌 전봇대가 늘어서 있었지만 우리 동네 하늘은 깨끗하고 트여 있었습니다.
저는 우리 동네는 참 깔끔해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이런 것들이 신도시의 특징이며, 전선 지중화라는 계획의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아파트 단지 안을 뛰놀던 때를 기억해 보면 전선이나 전봇대를 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도심을 지나가다 전봇대와 전선이 복잡하게 얽힌 풍경을 보면 살짝 답답함과 낯섦을 느끼곤 합니다.
이처럼 신도시는 도시 전체가 잘 정돈된 거대한 공원처럼 보였습니다. 다만 그 자유로움도 치밀하게 계산된 계획의 결과였습니다.
신도시의 상가는 오래된 간판이나 무질서하게 삐죽 나온 상점들이 없었습니다.
모든 간판은 정해진 크기와 색상으로 가지런히 붙어 있었고, 상가 건물 자체도 통일된 디자인으로 지어졌습니다.
우리가 만화책을 사러 간 문방구나 떡볶이를 먹던 분식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엄마 손을 잡고 구도심의 전통시장에 가면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졌습니다. 서로 다른 글씨체의 간판들이 붙어있었고 가게마다 향기와 소리들이 뒤섞여 생생한 활기로 가득했습니다. 신도시에서는 느껴볼 수 없는 생동감과도 같았습니다.
갓 구운 빵 냄새, 생선 비린내, 튀김 기름 냄새가 좁은 골목 안에 가득 찼었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흥정하고 웃으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신도시는 깔끔하고 질서 있었지만 구도심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삶이었습니다.
치열하고 거칠지만 정이 있었고 무질서하지만 예측 불가능했기에 더 재미있고 인생에 가까운 느낌입니다. 신도시의 질서는 편리했지만 많은 것이 정해진 틀 안에 있었고 그 틀 안에서만 움직여야 했습니다.
우리가 살던 신도시는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그어진 도로로 가득했습니다.
효율적인 도시설계의 결과로 자동차를 타거나 자전거를 타고 놀기에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 구조 속에서 좁은 골목길에서 숨바꼭질을 하거나 우연히 새로운 공간을 발견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서울의 오래된 동네들을 걷다 보면 좁은 골목길 사이로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그 안에서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교류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비좁고 불편하지만 그 속에는 사람들의 시간이 흐르고 추억이 저장되고 있었습니다.
신도시의 반듯한 도로는 효율적이었지만, 그만큼 우연한 마주침이나 예측 불가능한 발견이 주는 재미는 포기해야 했던 것입니다. 모든 길이 명확하고 투명해서 길을 잃을 일은 없었지만 그만큼 길 위에서 마주 할 수 있는 관계도 제한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신도시는 명확하고 편리한 길을 제시하였지만 그만큼 길 위의 이야기는 줄어들었습니다. 도시의 효율성은 높았지만 의외성이나 경험은 줄어든 셈입니다.
신도시의 아파트와 상가 건물들은 모두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습니다. 모두 비슷한 외관과 색채를 가진 아파트, 상가, 공공건물이었습니다. 마치 도시 전체가 한 번에 매직처럼 나타난 것 같았습니다.
다만 시간의 흔적이 쌓인 건물들은 없었습니다. 고즈넉한 한옥이나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근대건축물처럼 건물 또는 소유주 자체가 지나간 시간과 역사를 이야기해 주는 곳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물론 어린 시절, 깨끗하고 높은 건물의 외관이 낯설지 않았고 오히려 신식이라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어른이 되고 도시건축학을 배우면서 건물이 단순히 구조물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과 사람들의 삶을 담아내는 그릇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서울 도심의 오래된 건물들을 보면 창문 하나, 벽돌 하나에도 이야기가 묻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신도시의 건물들은 신도시의 건물들은 깔끔하고 현대적이었지만, 단편적이었고 그런 깊이 있는 이야기는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신도시의 건물들은 효율적이고 기능적이었지만 거주하고 이용하는 사람들의 일상과 추억은 빠져있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여전히 신도시의 건물들은 삶, 시간, 역사, 문화보다는 기능에 충실한 모습입니다.
신도시는 계획된 공간이었습니다. 하늘에는 전봇대가 없었고, 상가에는 무질서한 간판이 없었으며, 골목길도, 오래된 건물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어릴 적에는 이 모든 것이 그저 ‘깔끔함’과 ‘좋음’의 증거처럼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깔끔함 뒤에 숨어 있던 결핍을 서서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너무 깨끗한 물에는 고기가 살지 못한다.’는 말처럼 지나치게 정돈된 도시에는 삶의 복잡함과 다양성이 머물 자리가 부족했습니다. 신도시는 쾌적하고 질서 있었지만 그만큼 우연한 만남이나 시간의 흔적과 같은 삶의 진짜 모습은 숨어 있었습니다.
물론 신도시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신도시는 분명 많은 것을 이뤄낸 공간이고 계획이었습니다. 우리가 뛰놀던 아파트 단지, 깨끗한 상가, 반듯한 도로는 많은 도시 개발의 모델이 되고 있으며, 또 다른 형태로 반복될 것입니다. 다만 그 속에 삶을 담기 위해선 이제는 단순한 계획과 효율성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우리 세대는 알고 있습니다.
신도시에서 자란 우리는 질서 속의 결핍을 경험한 첫 번째 세대일지도 모릅니다. 그 덕분에 이제는 도시를 바라보는 눈도 달라졌습니다. 도시는 단순히 공간의 집합이 아닙니다. 오히려 조금은 어긋나고 낡으며 비효율적인 것들도 품을 수 있을 때 우리는 그곳을 살아가고 싶은 곳이라고 느낍니다.
흔히 말하듯 ‘도시는 유기체‘입니다.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이 우리의 불완전한 삶과 닳아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