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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메트리오 Nov 02. 2020

그림 같은 단풍을 보며

 서울대공원 가을여행

가을의 대표 주자인 단풍을 만나기 위해 오전 9시쯤 과천에 있는 서울대공원으로 갔다. 내가 살고 있는 남부 지방은 단풍이 많이 물들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에 제대로 단풍 구경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내부에 국립현대미술관이 위치해 작품 감상을 할 수 있어 일거양득이었다.


수풀이랑 나무가 잔잔한 분위기를 더해준다.


서울대공원에는 호숫가 둘레길과 산행길이 서로 연결돼 있어서 호숫가 둘레길에서 위로 올라가도 되고 산행길에서 아래로 내려가도 된다. 산행길은 어떨까 싶어 삼삼오오 모이신 어르신을 따라갔다가 지쳐서 호숫가 둘레길로 내려가니 작은 다리와 함께 단풍이 보였다. 수풀이랑 나무가 우거져 아무도 없을 듯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무도 밟지 않는 길을 지나가는 듯한 느낌. 이 공간에 나만 있다는 생각에 묘한 기분을 느끼고는 다리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테마파크 장미정의 다양한 장미
한동안 바라본 단풍 절경


그런데 다리를 건너자 동물원과 서울랜드가 보이면서 마치 여기서 모이자고 미리 약속을 한 듯이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다양한 곳으로 이동하는 인파 속에 홀로 남아있는 나는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마음 가는 대로 가보기로 하며 네이버 지도 어플에서 나왔다. 첫 번째로 들른 곳은 테마파크. 입구에 장미 정원이 있다고 해서 들어가 봤다. 향기를 맡으며 장미가 완전히 지기 전에 사진을 찍어댔다. 그런데 더 좋은 것은 따로 있었다. 테마파크 안쪽 아랫길을 쭉 걸어가니 드넓은 호숫가와 단풍이 절경을 이루며 색깔 놀이를 하고 있었다. 붉게 물든 완전체 낙엽, 주황색을 띤 과도기 낙엽, 푸른 녹색을 유지한 낙엽. 노란색의 은행나무도 드문드문 보였다. 땅 위와 물 위의 경치 둘 다 나름의 운치가 있었다. 햇빛이 드는 근처 벤치에 자리를 잡고 한동안 시선을 고정한 채로 한 폭의 그림과 같은 풍경을 감상했다. 물 위에는 오리와 거위가 푸드덕거리며 날아갔고 땅 위에는 까치와 참새가 지저귀며 화음 아닌 화음을 조성했다. 그러다 어린애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들리면서 고요한 분위기를 깨뜨렸다. 벤치에서 일어나서 나머지 반 바퀴를 걷고는 공원에서 빠져나왔다.


단풍을 많이 접할 수 있는 단풍 둘레길


테마파크에서 나오자 단풍 둘레길이 있다는 표지판을 보고 곧장 거기로 달렸다. 차도를 사이에 두고 양 옆과 가운데에 단풍나무가 일렬로 정렬해 있었다. 울긋불긋한 단풍의 색깔과 청계산의 조화에 눈이 한껏 즐거워졌다. 그러다가 왜 특정 구역의 단풍이 더 잘 드는지 문득 궁금해서 단풍을 가까이서 보기로 했다. 지대가 특별히 높은 곳도 아닌데 말이다. 근데 나무에 가까이 접근해 보니 멀리서 볼 때랑 사뭇 달랐다. 성한 단풍잎도 있었지만 상처투성이인 단풍잎도 있었다. 어떤 단풍잎은 케첩과 같은 진한 빨간색이었고 어떤 단풍잎은 노을과 같은 그윽한 빨간색을 띠며 저마다의 붉은색으로 시간을 간직하고 있었다. 단풍잎을 보면서 장석주 시인 대표작 <대추 한 알>의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개, 천둥 몇개, 벼락 몇개"라는 구절이 떠올랐는데 붉어짊을 위해 몇 개의 태풍과 천둥과 벼락을 견뎠을지 잠깐 상상을 해봤다. 그리고 나무에 붙어있는 단풍잎과 떨어진 단풍잎을 번갈아 보면서 괜한 사색에 잠겼다. 자연에 머무르면 왠지 그렇다. 여행하면서 아름다운 장면에 도취되다가 어떤 생각에 잠기면서 동적인 행위와 정적인 행위가 반복적으로 이뤄진다.


억새가 더해진 호숫가 둘레길


단풍 둘레길을 돌다가 테마파크 반대편에도 호숫가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음을 알았는데 표지판을 보고 헛웃음이 나왔다. 그냥 호숫가 둘레길이 아니라 "전망이 좋은" 호숫가 둘레길이란다. '전망이 좋다고 스스로 홍보를 하네. 정말로 전망이 좋은가?'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들어 단풍 둘레길 대로변에서 빠져나와 좁은 흙길로 향했다. 바로 호수가 보이겠지 생각했는데 처음에는 나무가 호수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러다 억새가 환영하면서 호수를 맘껏 보라고 손짓을 했다. 물가 앞에 갈색을 띤 억새 뒤편으로는 롤러코스터를 비롯해서 서울랜드가 보였다. 하얀 억새는 멀찍이 뒤에 있었는데 구름 사이로 햇빛이 관통하면서 억새에서 순간 빛이 났다. 찰나의 인상 깊은 장면을 마주한 즐거움을 가지고 더 걸어보기로 했다. 저 멀리 국립현대미술관 건물이 보이고 리프트가 대열을 이루면서 가고 있었다. 산자락의 장관과 더해져 또 다른 그림과 같은 풍경이 나왔다. 잠깐 쉬면서 다시 감상 모드로 들어갔다.



여기저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걸어보니 오후 3시가 넘었다. 장장 5시간 넘게 둘러본 서울대공원. 오래간만에 긴 산책을 하면서 가을의 다채로운 향연 앞에 호강에 찬 눈이었다. 참 좋은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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