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엄마로 살면서도 이렇게 꿈이 많은데 내가 이렇게 나의 어린 시절을, 나의 소녀시절을, 나의 처녀시절을 하나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데 왜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인 것으로만 알고 있었을까...
- 신경숙, 엄마를 부탁해
나는 61년생 소띠다. 나는 나의 엄마가 살아온 세월들을 떠올릴 때마다 힘겹고 고통스럽다. 일제시대에 태어나 강제로 일본어를 배워야했고 6.25 피난살이를 하느라 초등교육을 마치지 못해 늘 한스러워하셨다. 신랑의 얼굴도 모르는 채 열 아홉에 결혼해 시어머니의 병구완을 해야 했고, 목화를 재배해서 솜을 틀어 명주실을 짜서 일일이 가족들 옷을 지어드려야했다. 삼복 더위에 콩밭을 매다가 낳은 첫 딸의 출산 다음 날도 밭을 매러 나가야 했다. 산후조리는 커녕 그 몸으로 불을 지펴 가마솥에 밥을 해서 시부모와 남편 봉양을 해야 했으니 그 고달픈 심정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게다가 엄마가 남편을 떠나보냈던 40대는 이제와보니 너무나 젊은 나이였다. 사는게 무서워 온갖 허드렛일 막일을 가리지않으면서도 오로지 우리 5남매를 공부시켜 잘 살게 해야한다는 일념 뿐이셨다.
이 모든 일들을 상세히 듣게 된 것은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읽고나서 였다. 소설은 엄마의 실종으로 가족들이 갑작스레 '엄마의 부재'를 겪게 되면서, 그간 무심했던 엄마의 삶을 각자의 시선으로 돌아보며 절절한 회한과 사무치는 그리움을 담고있다. 그때 알았다. 엄마에게도 엄마가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엄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작정하고 홀로 계신 엄마네 가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엄마의 삶의 여정을 들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듣는것 만으로도 구비구비 고통이 밀려왔다. 급기야 나는 말을 막고 행복했던 때는 언제였느냐고 물었다. 잠시의 여유도 없이 곧바로 엄마의 대답이 돌아왔다. 없다고. 한 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다고 했다.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나는 당연히 엄마가 우리들을 키우면서 종종 행복했으리라 생각했다. 그만큼 엄마는 잘 웃는 분이셨다. 그러나 엄마의 행복과 우리와는 전혀 별개라는 것을 왜 몰랐을까. 엄마는 그저 엄마이기에 엄마로서만 만족하면 되는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스무 살 쯤이던 어느날 우연히 엄마가 조용한 목소리로 어떤 남자의 전화를 받는 것을 보고 몹시 놀라고 두려웠었다. 내게 엄마는 우리들의 행복만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존재여야 했다. 엄마는 자아를 찾아나서면 안되는 사람이었다. 나는 얼마나 철없고 잔인하며 이기적이었던가.그날 그 대답으로인한 충격으로, 안양에서 서울까지 집에 돌아오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 후 나는 엄마에게서 단 한번이라도 행복하다는 말을 듣는 것이 삶의 의무이자 목표가 되었다. 그해 연말에 나는 처음으로 인근 호텔에 방을 예약해서 엄마와 세 자매가 첫 호캉스를 했다. 가까이 사는 오빠가 저녁을 사주고 돌아갔고 손녀는 케익을 사다 주었다. 그날밤 딸들과 침대에 앉아 소리내어 웃으시며 무척이나 기뻐하던 엄마의 환한 얼굴은 선물처럼 사진으로 남았다. 각자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매달 엄마와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구순을 앞둔 겨울엔 첫 해외여행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엄마를 위해 쇼핑을 하고 엄마가 좋아하는 메뉴로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왔다. 태평양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창가에서 엄마는 행복하다고 말했다. 천금같은 그 한 마디는 지금까지 엄마가 해준 어떤 말보다 달콤하고 아름다웠다.
엄마는 이제 지난날들이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고 한다, 엄마의 삶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기억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맙다고 하셨다. 오래된 묵은 감정들을 털어낸 엄마의 마음은 날아오를 만큼 가벼워 보였다.
어쩌면 엄마란, 나를 사랑해서 전적으로 나를 지지해주고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누군가의 이름이 아닐까. 그래서 이 세상 누구나 엄마가 필요하고, 엄마를 그리워하며, 일평생 엄마를 찾는 일에 몰두하는가 보다. 심지어 엄마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