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세 고객님과의 느린 시간

by 봄날의 옥토

87세의 어르신이 지팡이를 옆에 세워두고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으셨다.

통장을 확인해 보니, 만기가 된 계좌가 세 건이었다.

세금 혜택을 위해 일부러 나누어 가입하신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계좌를 하나로 해주세요. 복잡해서 관리하기 어렵네요.”

“아, 고객님. 사실 저희도 그렇게 해드리면 더 편하답니다. 그런데 이자를 조금이라도 더 받으시라고 일부러 분리해 둔 거예요. 번거로우시더라도 이대로 유지하시는 게 이득입니다.”


설명을 들으신 어르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군요.” 하셨다.


“지금 6개월 예금 특판이 진행 중인데요,

1년 예금보다 금리가 조금 더 높습니다.

이번엔 6개월로 해보시는 건 어떠세요?”


“그냥 1년으로 하겠습니다. 다리가 아파서 자주 나오지를 못해요.”

“네, 고객님. 그럼 1년으로 재예치해드리겠습니다.”


요즘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종이 전표 대신 전자거래 화면을 이용한다.

어르신께서 직접 입력하시는 게 불편하실까 봐 염려스러웠지만,

하나하나 설명을 드리며 함께 진행하니 곧잘 따라 적으셨다.


손이 떨려 계속 쓰기 힘들어 보이셔서 불편하시냐 여쭈었더니,

“괜찮아요. 천천히 하면 되지요.” 하시며 미소를 지으셨다.

그래서 나도 어르신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업무를 진행했다.

빠르게 변화하는 디지털 환경은 젊은 사람에게도 벅찬데, 연세 드신 분들에게는 얼마나 낯설고 어려울까.

겁이 나서 시도조차 못 하겠다는 분들도 많다.


“평소에 글씨 쓸 일이 별로 없는데, 이럴 때 글씨 연습도 하고 좋네요. 하하.”

처음엔 긴장한 듯 굳어 있던 어르신의 표정이 점점 부드러워졌다.

업무가 끝나고 통장과 사은품을 받아 들고 나가시며

환하게 웃으시던 그 미소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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