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으로

by 봄날의 옥토

나이 지긋한 남자 고객님이 내 앞에 앉으셨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어떤 업무 도와드릴까요?”
“예금이 만기가 되어서 재예치하러 왔습니다.”

그때, 한 자리 건너에 앉은 직원에게서 사내 메신저로 메시지가 왔다.
‘과장님, 그분 오늘만 벌써 몇 번이나 다녀가셨어요. 같은 질문 계속하시고 조금 이상하세요. 아까는 2주 뒤에 만기 되는 예금이랑 합쳐서 하신다고, 만기처리 안 하고 가셨거든요.’

연세가 많으신 걸 보니 인지능력이 예전 같지 않으신가 보다 싶었다.
고객님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예전에 이 지점에서 근무할 때 뵈었던 분이었다.
신분증과 도장을 받아보니 역시 기억이 맞았다. 20년 넘게 같은 도장을 쓰고 계셨다.

“고객님, 저희 지점에 오래 거래하시네요. 교직에 계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맞으시죠?”
내가 예전 일을 기억한다고 말씀드리자 고객님은 환하게 웃으셨다.
“직원분이 기억력이 아주 좋으시네요. 이 동네에서 50년 살았습니다. 고등학교에서 근무하다가 퇴직했지요.”

예전의 그 고객님은 매우 총명하고 꼼꼼한 분이셨다. 만기일도 정확히 기억하시고, 통장 정리도 한 치의 오차 없이 해내셨다.
그런데 이제는 예금 날짜를 헷갈려하셨다. 통장을 손에 들고서도 내용을 잘 보지 못하셨다.
새하얗게 센 머리칼과 깊어진 주름이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말해주었다. 마음이 저릿했다.
그때의 총명함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하지만 우리가 옛날이야기를 나누며 기억을 더듬을 때, 고객님의 표정은 다시 환하게 밝아졌다.
그 미소 속에서 잠시, 예전의 그분이 돌아와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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