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붓에서 다시 쿠타로
우붓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바닷가 지역인 쿠타로 다시 향하기로 했다. 그냥 가면 아쉬우니 택시를 하루 대절해서 내려가는 길에 주변 유명 관광지들을 둘러보기로 했다. 아침과 점심 메뉴를 택시 기사분에게 추천을 받는다는 전통적인 맛집 탐색 방법을 사용했는데 이 메뉴 선정 방법은 실패했다. 발리에서 유명한 바비 굴링 babi guling이라는 음식이 있다. 돼지 통구이 바비큐인데 한 마리씩 주문하는 것은 아니고, 식당에서 주문하면 바비큐를 부위별로 조금씩 썰어다가 소스와 함께 밥 위에 얹어서 덮밥으로 내어준다. 이날 아침으로 이 메뉴를 먹기로 하고, 아침에 택시 기사분께 바비 굴링을 파는 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했다. 나는 택시 기사에게 ‘음식점을 추천해 달라’라고 말하는 것은, 말 그대로 ‘아무 음식점이나 데려다 달라’라는 뜻이 아니라 ‘택시 기사 당신 만의 맛집, 혹은 유명한 음식점으로 데려가 달라’라는 뜻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택시 기사는 전자의 의미로 생각한 것이다. 그가 데려간 곳은 구글 맵에도 없고 간판도 없는 어느 길가의 식당이었다. 한화 약 2000원의 저렴한 가격이었다. 정말이지 말 그대로 주변의 바비 굴링을 파는 아무 식당이었다. 고명이 상대적으로 적어 소스와 밥을 먹어야 하는 저렴한 가격에 맞는 음식이었다. ‘그래, 현지인들에게 바비 굴링이라는 음식은 이런 느낌이구나. 고기가 가득 올라가 있는 버전은 부유한 관광객 대상 음식이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생각보다는 맛있게 먹었다. 지혜는 느낌이 다른 듯했다. 이 짧은 여행에서 한 끼를 먹어도 제대로 먹어야 하는데, 이렇게 밥으로만 배를 채우는 것이 아깝다는 평가를 했다.
아침을 먹고 발리 중앙에 위치한 ‘푸라 울룬 다누 브라탄’이라는 호수를 끼고 있는 힌두 사원과 그 근처의 ‘바뉴말라 폭포’를 방문했다. 자연이 훌륭한 발리이기에 이렇게 산속이나 외진 곳에 있는 사원들은 제법 볼만하다. 울룬 다누 브라탄은 높은 산속 호수 옆에 있는데, 호수에 낀 안개와 호수 위에 뜬 것 같은 사원의 모습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바뉴말라 폭포는 사원 근처에 위치한 폭포다. 구불구불한 비포장도로를 한참 가다 보면 차는 들어갈 수 없는 길이 나오는데, 산길을 오르락내리락 한 30분을 걷다 보면 두 줄기의 폭포가 보인다. 이 폭포까지 들어가는 비포장도로가 굉장히 험난한 길이었기에 운전이 힘들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는데, 택시 기사는 아무 불평 없이 우리를 폭포로 데려다주었다. 아무래도 접근성 때문인지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쾌적하게 놀 수 있었다. 갈아입을 옷을 챙겨서 폭포로 향한 것은 아니었는데 햇빛이 워낙 강렬해 오는 도중에 대부분 말랐다. 물놀이로 인해 배고파진 우리는 점심을 기대하며 다시 산길을 오르락내리락 30분을 걸어 차로 돌아갔다.
아침 식당을 보고 눈치를 채서 우리가 직접 점심 장소를 정했어야 하는데, 설마 이번에는 괜찮은 식당이겠지?라는 순진한 생각으로 점심에도 기사 추천 식당으로 갔다. 여기는 가관이었다. 아침은 진짜 현지인들이 가는 식당이라 우리의 목적과 달랐다고 한다면, 점심은 아주 대놓고 관광객을 털어먹기 위한 식당이었다. 마치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면 흑돼지 제육볶음 (퀄리티도 별로고 양도 적은) 가게를 꼭 데려가는 것처럼, 발리 택시 기사들과 가이드들, 수많은 패키지들은 관광객들을 이 식당으로 데려왔다. 그 수많은 흔적들이 구글 맵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지역 가이드’ 타이틀을 단 사람들의 별점 5개가 굉장히 꼴사납다. 이 가게 주인이 가이드들에게 금전적 혜택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지혜와 나는 확신했다. (Mentari Restoran)
아침은 차라리 가격이 저렴하기라도 했는데, 여기는 인당 만 원이 넘는 가격이었다. 조리된 지도 오래되고 맛도 없는 음식들이 뷔페식으로 있었다. 발리에서 먹은 컵라면이 훨씬 낫다고 지혜는 말했다. 등산과 물놀이로 배가 고파졌음에도 맛이 없었다. 대충 만든 것 혹은 레토르트인 것이 확연히 드러나는 음식들 중에서 그나마 괜찮은 것들로 골라 조금 먹었다. 이 가게에서 유일하게 다행인 점은 속은 것이 우리만이 아니라는 사실 그 하나뿐이었다. ‘투어리스트 트랩’이라는 명칭이 딱 알맞은 식당이었다. 택시 기사에게 음식점을 추천해 달라고 하는 것이 만국 공통의 맛집 검색법이 아니구나 하는 교훈을 얻었다.
점심을 먹고 난 후 ‘타나 롯’이라는 해안가 절벽에 위치한 사원으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동안 한차례 비가 내려서 맑아진 하늘과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이 탄성을 자아낼 만큼 훌륭했다. 넓어서 볼 만한 곳들도 많았고, 얕은 바다를 건너 이마에 쌀알을 붙이는 무언가 종교적 의식도 체험해 보았다. 사원 구경을 끝내고 수평선이 시원하게 펼쳐진 해안 절벽 위의 한 음식점에 앉았다. 드넓은 바다를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진다. 타나 롯은 발리의 남서쪽이니까 지금 보이는 이 바다 끝에는 아마도 남극대륙이 있을 것이다. 물론 아주 멀어서 보이지는 않지만. 시야에는 섬도 하나 없이 그저 모두 바다뿐이다. 시야의 끝으로 가면 바다와 하늘이 하나로 합쳐져 구름이 바다 위에 떠 있는 듯하다. 마치 육지의 끝에 앉아있는 것만 같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란 사람과, 한국처럼 육지에는 산 그리고 바다에는 섬과 다른 대륙으로 시야가 막힌 자연에서 자란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어느 것이 좋은지 나쁜지는 모르겠지만, 성정에 있어 확연한 차이를 드러낼 것이 틀림없다. 시야가 탁 트인 곳에서 살면 모험심이나 대범함과 같은 밖으로 뻗어나가는 류의 성질이 강한 사람으로, 그 반대에서는 섬세함이나 내실을 다지는 류의 성질이 자라나지 않을는지. 또 현대 도시처럼 자연이 극히 적은 환경에서 자라면 또 다른 성격이 발현되지 않을까. 사회학 논문 주제로는 부적합하지만 소설 인물 설정이라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광활한 바다와 탁 트인 시야 속, 예를 들면 폴리네시아의 섬과 같은 곳에서 자라 섬을 떠나길 열망하여 도시로 넘어온 여자. 내밀하고 울창한 산속에서 산길과 계곡을 누비며 자랐으며 자연이란 넓은 것이 아니라 깊은 것이라 생각하는 남자. 그리고 자연을 보지 못한 채로 도시에서 나고 자란 그들 사이의 자식. 이 가족을 등장인물로 하여 인간 내면의 차이와 불일치에 대해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망상을 접어두고 여행으로 돌아가자. 타나 롯 구경을 마치고 새로 예약한 숙소에 짐을 풀고 ‘레기안 푸드코트’에 저녁을 먹으러 향했다. 다양한 나라와 여러 스타일의 음식점들이 모여있는 야외 푸드코트인데, 분위기도 좋고 가격도 저렴해 보였다. 해산물이 유명하다기에 랍스터를 먹어보려 했는데, 미리 예약이 필요한 메뉴라 대신 조개와 오징어, 생선을 먹었다. 해산물 고유의 맛을 살린 숯불 구이에 심플한 소스만을 곁들인 음식들이었고 정확히 기대하던 맛이었다. 이날 처음으로 제대로 된 음식을 먹었다. 다만 이 음식을 마지막으로 남은 며칠 동안은 이런 유의 길거리 노점이나 간이식당의 발리 음식들은 먹지 않았다.
“나 이제 발리 음식 말고 다른 음식 먹고 싶어.” 하고 지혜는 말했다.
“왜? 발리 음식 별로야? 향이 강해서 그런가?” 내가 물었다.
“아니. 나 태국 음식은 좋아하잖아. 향 때문은 아니야. 기름 냄새가 이제 역해져서 도저히 못 먹겠어.” 지혜가 말했다.
“기름 냄새?” 지혜가 기름 냄새를 언급하니 나도 생각나는 냄새가 있었다. 다른 사람이 싫다고 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갈 만한 그런 냄새가 굽거나 튀긴 음식들에 전반적으로 있었다../
“그래. 기름. 제대로 된 가게에 가자. 간이식당이나 길거리 음식 같은 데서는 그런 향이 심해. 원래도 느꼈는데 이제는 역해져서 힘들어. 브런치나 프렌치 레스토랑이나 그런 곳을 가자.” 지혜는 선언했다.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이런 대화를 마친 후 푸드코트를 나왔다. 쿠타의 밤거리를 산책하며 라이브 공연을 하는 술집을 찾아서 기웃거렸다. 마침 시간이 딱 맞게 공연을 하는 곳이 있어서 그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발리 전통의상을 입은 가게 주인이 기타를 들고 연주를 했다. 맨 앞에 앉은 호주인 혹은 미국인처럼 보이는 관객이 기타 연주 하나하나에 열광적인 반응을 했다. 우리는 그 광경을 보며 안심스테이크를 먹으며 칵테일을 먹는 것으로 이날의 일정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