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구되지 않기
우리 인생은 단 한 가지 사건이나 단 한 명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인생이라는 커다랗고 복합적인 시간들은 그렇게 단순하지 못하다. 더욱이 부탁을 거절할 때, 누군가의 마음이 읽히면 더 복잡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스로가 원하는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기결정권을 연습하지 않는다면 정말 필요한 순간에 애매하게 착한 호구가 된다.
몇 달 전 아빠가 우리에게 부탁하나를 했다. 어차피 너희가 독립을 한다고 하는데 그럴 바엔 그냥 여기에서 살면서 아빠한테 몇십 만 원을 주는 것은 어떻겠냐는 요청이었다. 아빠는 미안하셨는지 현재 시세와 물가에 비하면 낮은 거라는 설명까지 덧붙이셨다. 우리 아빠는 식당에 가서도 추가 반찬을 시키지 못할 정도로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다. 그런 아빠가 나와 동생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말 그대로 '긴급'이라는 뜻이었다. 아빠와 엄마가 평생을 모은 노후자금을 몽땅 보이스피싱으로 날리면서 비상등이 켜진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나와 동생은 아빠에게 힘들다고 말해주셔서 감사하다, 우리도 최대한 돕겠다고 하였다. 아빠의 마음과 사정이 읽혀서 알겠다고 했지만, 사실 나는 그때 '죄송하지만 못하겠다.'라고 말했어야 했다.
상대방 감정을 너무 잘 알 것 같아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을 표현하지 못했다.
-호구-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결정할 때는 상대방에 대한 감정보다는 내 현재 상황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탁을 들어주고 싶은 이의 부탁을 들어줄 때보다 부탁을 거절할 때 자기결정이 더 힘든 것 같다. 비록 더 힘들더라도, 혹은 더 힘들기 때문에 거절할 때는 거절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힘든 상황을 유연하게 대처하는 힘은 나를 변호하는 힘이다. 거절에 대한 의사소통을 꾸준히 연습하다 보면, 점차 더 멋지고, 더 우아하게 나를 변호하게 되지 않을까. 지금은 내가 생각해도 나를 변호하는 모습이 하찮긴 하다. 여하튼 한국에 살고 있는 이들이라면 살면서 결정권을 온전히 쥐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 있는 환경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결정하고 표현하는 연습을 꾸준히 해야 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적어도 향후에 내 인생 경로에서 나 다운 삶을 꾸려갈 수 있으며, 무엇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을 수 있다. 누군가의 상황을 개선할 만한 능력이 안된다고 해서 호구는 아니다. 하지만, 나를 위한 상황을 개선하는 능력이 없다는 것은 호구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