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일지라도
관계주의 속에서 '나'가 아닌 타인을 위한 선택을 하는 것은 흔하다. 아무도 강요하거나 압박하진 않지만 '눈치껏' 타인을 위한 결정을 내린다. 한국의 눈치 보는 문화는 '다른 사람의 의도와 정서를 파악하여 행동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개인적으로 이는 고유한 정서인 한(恨)으로부터 이어져 온 게 아닐까 싶다. 한(恨)스러운 마음은 표현하지 않고 묻어둘 때 한(恨)스럽다고 표현된다고 보는데, 이 깊은 슬픔조차 표현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의사표현이 눈치 보는 문화로까지 이어져 온 것 같다.
한(恨): 몹시 원망스럽고 억울하거나 안타깝고 슬퍼 응어리진 마음.
예로부터 상부상조하던 문화는 타인의 감정까지도 상부상조 해왔나 보다. 타인을 배려하여 자신의 표현을 절제하고, 그런 문화 속에서 타인의 감정을 헤아려 왔으니 말이다. 그러나 관계적인 가치를 강조하는 사회에서는 개인적인 가치가 소외되기 쉽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는 개인의 의견이나 표현이 달갑지 않은 것이 된다. 그렇기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주체성을 갖는 것이다. 만약 내가 어떤 상황에 어쩔 수 없이 동의하고 있다면, 원하지 않지만 동의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라도 해야 한다. 굉장히 소극적인 태도이지만, 필요하다.
타인을 위해 눈치껏 행동하는 것도 내 선택인데, 그러한 선택들로 인해 타인을 위해 결정을 내리를 자기결정권이 강화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다. 자기결정권에도 다양한 성격이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타인을 위해 결정을 내리를 성격의 자기결정권도 있고, 스스로를 위해 결정을 내리는 성격의 자기결정권도 있다. 내게 익숙한 자기결정권의 성격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어떤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하는지도 자각하게 된다.
관계주의 속에서 아무리 타인의 영향에 따라 행동한다 한들, 그것 또한 내 선택임을 알고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내가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이나, 타인과 소통하는 방식이 편하지 않다면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내 결정과 선택에 대해서 고민하고 개선해 나가는 것은 내가 원하는 인생을 선택하고 있는 것과 같다. 관계주의 속에서 타인의 생각과 감정에 많은 영향을 많이 받을 순 있지만, 그 영향에 휩쓸리지 않겠다고 결정할 순 있다. 만약 현재 맺고 있는 관계들이 버겁다고 느껴진다면, 나를 위한 경계선을 재설정 해야 하는 시기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