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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갓생을 위한 선택

나와 사회의 조화

by 이면

많고 많은 갓생 사는 방법들 중, 결국 궁극적인 ‘올바른 선택’은 어떤 분야에서 무엇을 선택하든 결국 ‘나에게 맞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그럼 나는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믿음이 단단할수록 내 인생을 위한 선택을 하나씩 해갈 수 있다는 말과 같다. 나다운 선택을 하며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어떤 역량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존엄성 그 자체이며, 기본법의 근간이기도 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개개인은 혼자 살아갈 수 없으며, 사회전반의 영향을 받는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고 보호하고 실현하면서 국가가 발전할 수 있는 제도와 법을 실현하고 시행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인은 개개인이 한 사회에서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만큼 인간의 존엄성과 개개인의 결정권을 보장해야 하는 의무를 가진다.


법은 벼의 모종이다.
정책은 쌀이며, 정치인은 주방장이다.


식당에 갔다고 가정해 보자. 식당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주문한다. 제안이다. 식당은 메뉴판에 있는 메뉴에 한 해서 주문한다면 그것을 제공할 의무를 가진다. 만약 내가 메뉴판을 보고 건강에 좋은 곤드레 비빔밥을 주문했는데, 건강에 좋지 않은 가공된 인스턴트 소시지가 나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그러나 이의를 제기해도, 심지어는 어느 식당에 가도 내가 원하는 곤드레밥은 먹지 못하고 인스턴트 소시지만 먹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사람은 결국 그 상황에 적응한다. 심지어는 나중 되면 다양한 메뉴판을 보고도 주문하지 않는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제공되는 인스턴트 소시지를 먹는다. 그때 주문자가 해야 할 것은 지금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식당은 내가 주문한 건강식을 줘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삶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미래가 곧 부서질 것 같은 모래성 같다면 그건 사회적 의사소통 구조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다. 내가 원하는 선택이,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사회구조적으로 제한되고 있다면 나뿐만 아니라 나와 함께 이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의 존엄성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사회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그러나 경쟁사회에서 치킨게임을 할 것인지, 협력하는 사회에서 자아실현 하며 살아갈지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다.


청소년이 더 이상 자살하지 않고 자신의 기량을 펼치는 사회, 청년들이 더 이상 숨지 않고 당당하게 사회에서 역량을 발전시키는 사회, 양육자들이 경력단절과 경제적인 고민 없이 사회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사회, 어린이들이 사교육에 혹사되지 않고 웃고 떠들며 자신의 경계를 다져가는 사회, 양육자와 자녀들이 충분한 정서적 시간을 가지는 사회, 나이가 들어갈수록 갈 곳을 잃어가는 것이 아닌 나이가 들어갈수록 연륜에 대한 존경을 받는 사회, 실패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훈장인 사회.


지금까지 그래왔듯 우리 사회는 인간존엄성을 유지, 보호, 실현할 수 있는 합리적인 사회로 발전해 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원하는 진정한 갓생을 좀 더 빠르게, 좀 더 안전하게, 좀 더 편하게, 좀 더 조화롭게 이뤄내는 좀 더 주체적인 방법에 있다. 바로 정말로 내가 원하는 삶에 대해 모두가 함께 고민과 대화를 시작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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