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죽음 앞에서 – 그립습니다 아버지 2

by 하울

장례를 치른 후 유품을 정리하다 중절모 하나를 발견했다.

아버지가 환갑을 맞으셨을 때 내가 드린 선물이었다.

상표도 떼지 않은 걸 보니, 아끼신 흔적이 역력했다.

나는 그 모자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리고 유품 속에서 스프링 공책 한 권이 나왔다.

평소 글쓰기를 즐기시던 아버지께

병이 깊어질 때 무료함이라도 달래시라며 드렸던 공책이었다.

첫 장을 펼치자, 단정한 손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약자와 초서체로 섞인 한자 문장들이 절반을 차지했다.


“서기 2003년 1월 24일 목요일.

오늘은 나의 생일이다.

아내가 점심으로 떡국을 끓였다.

저녁에는 자녀들과 외식을 하며 기분 전환이 되었다.

손자들과 함께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내린 눈으로 길바닥이 얼었다.

이 몸은 언제쯤 과거처럼 가볍게 걸을 수 있을까.

근육이 사라지고 힘이 자꾸 빠지니 참으로 이상하다.

자식들에게 짐이 되는 아비가 될까 두렵다.

생각하니 괴롭다.

눈 내리는 고향을 떠올리며 창밖을 보니 마음이 우울하다.

그 옛날, 눈 오는 날 저녁이면 무와 배추뿌리를 먹었는데,

돌아보니 그때가 참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날그날 드신 음식과 복용한 약 이름까지,

사관이 역사를 기록하듯 꼼꼼히 적혀 있었다.

인상 깊은 장면은 그림으로까지 남겼다.


사마천이 궁형을 당하고도 《사기》를 써낸 그 정신과 무엇이 다를까.

아버지는 반년 동안의 기록을 남기고 떠나셨다.

공책의 뒷장으로 갈수록 글씨는 떨렸고,

문장은 점점 짧아졌다.


공책의 마지막 장들은 텅 비어 있었다.

마치 나에게 남기신 숙제처럼.

아버지의 공책은 추억이라는 향기를 풍기며 내게 다가왔다.

좋은 향기와 아픈 향기가 뒤섞여 있었지만,

아버지를 떠올리면 언제나 짠한 마음이 앞섰다.


평생을 직장과 집을 시계추처럼 오가며 사셨던 분,

퇴직 후엔 인생을 좀 즐기시길 바랐지만,

끝내 스스로에게 굴레를 씌운 분이었다.

나는 오늘도 홍매화의 여윈 가지에 기대어 아버지를 떠올린다.


아버지가 남기신 향기가 내 안에 흐르듯,

언젠가 나의 향기는 내 아이들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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