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4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운명을 리드하라-빅뱅이론과 명리학

by 김성현 Jul 21. 2022

우주의 기원에 대한 빅뱅이론과 명리이론


“I’m a fortune's fool!”

-Romeo & Juliet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상식이다. 당연히 명리학은 그런 기본적인 상식을 무시하면서 사람들에게 운명의 중요성을 설파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자유의지의 원칙에 근거하고 있고, 이 바탕에는 모든 사회적 형태에서의 가장 근본적이고 원칙적인 의미에서의 인간의 자유를 최우선의 가치를 둔다는 합의가 깔려 있다. 운명을 추리한다는 다소 결정론적인 어감이 강한 단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팔자론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함부로 무시한다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자유의지와 결정론 사이에는 묘한 역설적 관계가 존재한다. 자유의지가 발현되는 근본적인 동기부여는, 일종의 결정론적인 믿음에 근거하고, 결정론적인 인식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발현하게 하여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는 노력과 시도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인간이 빛보다 빠른 속도로 여행을 떠난다면 시간을 거슬러 갈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생각을 토대로 많은 시간여행에 관한 영화들이 만들어 졌는데, 거기에는 시간여행을 거슬러 개인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시간여행을 다루고 있는 영화들이야말로 결정론적인 세계관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서양의 Destiny, Fate, Luck 모두 어떤 후천적인 노력이나 우연으로 자신의 운명이 결정적으로 바뀌지는 않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대부분의 시간여행에 관한 영화들도 많은 주인공들이 시간을 거슬러 운명을 바꾸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예정된 결론은 바꿀 수 없다는 일종의 비극적인 인식으로 마무리 된다. 그 흐름은 다소 달라질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다다르는 결론은 같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약간이나마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근거를 토대로 했을 때 그렇다. 만약 시간을 거슬러 어떤 일의 운명을 바꾸는 것이 가능한 것으로 보여준 영화가 있다면 그것은 매우 공상적인 판타지 였을 것이다. 이를 테면, 슈퍼맨 1편에서 슈퍼맨은 자신이 사랑하는 로리가 지진으로 죽게 되자, 지구를 빛보다 빠른 속도로 역주행 하면서 지구의 회전방향을 바꾼다. 물론 황당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 메시지는 필연적인 결론을 슈퍼맨의 초인간적인 힘으로 바꿀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슈퍼맨의 초인간적인 힘과 속도가 아니라, 결론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역으로 말해서, 결론을 바꾸는 것은 슈퍼맨 같은 초인적이고 공상과학같은 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고, 다시 말해 인간의 운명은 절대 바꿀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명리는 필연성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으로 구성된 결정론이 아니다. 명에 대한 고인들의 관념은 현대인들의 경직된 사고보다 훨씬 더 유연하다. 명리학의 백과사전격이라 할 수 있는 삼명통회에서 말하는 인간의 운명과 명리학의 관계는 널리 통용되는 교조적인 명리에 대한 편견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릇 명은 음양에서 내려 받는데 생하는 초에 사람의 힘으로 내려 받아지는 것을 바꿀 수 없고, 바꾸지 말아야 하고, 바꾼다하여도 당사자는 바꿀 수가 없다. 태어남에 있어서 부유한자, 가난한 자, 수명이 긴자, 일찍 죽는 자, 또 가난하고 천한자, 또 인간 이하가 된 자, 수명이 길게 부여 받았지만 일찍 죽는 자, 또 태어날 때 요절할 명인데 오래 사는 자 이 모든 것은 업보에 말미암아 자연히 간여되고 또 성에 말미암아 자연히 간여된다.  업보에 적선을 많이 한 자는 가난한데 부유하게 되고, 천한데 귀하게 되고, 요절인데 수명이 길게 된다. 예전에 사람이 하늘을 능가 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성품을 닦음으로 이 또 한 가능하다. 부귀한 자는 끝까지 부귀하고, 빈천한 자는 끝까지 빈천하고, 요절하는 자는 요절하게 되는 이를 두고 예전에 이르기를 명은 바꿀 수 없다고 하였지만, 오직 그러한 것은 아니다. 업보로 인하여 그렇게 된 것이면 성품으로 바꿀 수 있다. 

업보에 의거하여 운명에 내려진 부, 귀, 수, 요, 빈, 천의 어떠함이 있게 되고, 또 성품에 의거하여 부, 귀, 수, 요, 빈, 천이 어떠함이 있게 된다. 그래서 사람에게 업보도 중요하고 성품도 중요한 것으로 후생을 위하여 적선을 하고, 또 현생을 위하여 성품을 닦아야 한다. 명은 바꿀 수 없다고 하여 마냥 앉아서 기다리는 것은 옳지 않다. 명은 생하는 초에 부여 받는다 하였는데, 확실한 말이다. 어느 사람이나 천지중에서 태어나니 어느 누구나 오행 팔자가 똑같이 있게 되는데, 어찌 부귀빈천수요가 한결같지 않게 되는가 하며, 음양의 두 기가 교감할 때 진정이 묘합한 기를 받아서 응결하여 태가 되어 남을 이루고 여를 이룬다. 천지와 부모와 일시와 기후를 만난 그 어떠한 품질에 의해서 내려 받은 것이 맑고 깨끗한 자는 지혜가 되고, 또 어질게 되고, 내려받은 것이 혼탁하고 사악한 자는 어리석고 품성이 좋지 않게 된다. 지혜가 있는 자와 어진 자는 이것에 말미암아 부유하고, 귀하고, 수명을 길게 얻게 되고 덕이 풍부하여 복을 획득하게 된다. 어리석은 자와 품성이 좋지 않은 자는 스스로 어리석음과 좋지 않은 품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날로 더욱 혼폐해지고 빈천과 요절을 면하기 어렵게 되는데 이른바 어리석고 못난 것을 인간은 능히 바꿀 수 있는데 종내 바꾸지 못했기 때문이다.”(삼명통회)


정확하게 한계와 범위를 정의내리긴 어렵지만 일단 어느 정도 인간 개개인의 운명에 대한 팔자의 프레임은 분명 존재한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프레임이 자신의 자유의지의 발현과 배치된다는 사실을 가소롭게 여긴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의지에 대해 아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리학이 진보적인 인문의 정신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명리는 자신의 결정론적인 외모로 인해 자유의지라는 매우 당연한 신념체계와 불화함으로써, 자유의지의 문제를 당연하고 일상적인 층위에서 문제적인 층위로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질문할 수 있게 된다. “명리학이 결정론이라면, 과연 자유의지는 존재하는가” 라고. 비록 많은 사람들이 별다른 비판의식 없이 자신의 자유의지에 대한 거의 무한한 신뢰와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자유의지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명리학을 단순한 결정론으로 치부할 수 있는 정도의 단순한 논리라면 당연히 자유의지에도 똑같이 단순한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자유의지는 존재하는가?” 

     추상적인 자유의지의 문제는 인류 문명의 기원에서부터 존재했다고 볼 수 있지만, 현대적인 의미에서 자유의지의 문제가 중요한 화두가 된 것은 사회시스템이 고도로 정비되고 견고한 정치체제와 정치철학이 발달하게 되면서부터라고 할 것이다. 인간이 사회체제와 맺는 관계를 근간으로 했을 때의 자유의지의 문제를 생각해보면, 과연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샘 해리스를 비롯한 몇몇 철학자들은 이런 의미에서의 자유의지를 부정한다. 사회의 질서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교육받고 일하는 현대인들에게 순진한 의미에서의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유의지를 믿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교육과 미디어의 힘이다. 교육과 미디어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에게 자유의지가 존재한다고 믿도록 배우고, 그렇게 사고하도록 길들여진 것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자유의지는 노예제를 존속시키면서 동시에 은폐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아편과 같은 것이다.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은 중독적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의지가 침해받는다고 생각할 때, 마치 금단현상과 같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과연 내 삶은 얼만큼 자유의지적으로 유지되고 있는가? 도덕과, 교육과, 윤리, 사회적인 체면과 처벌과 구속에 둘러싸여 인간은 얼마나 제한적이고 구속적으로 살고 있는가? 심지어 현대인들의 주거공간조차 인간은 별로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해주고 있는데, 정작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이 결정된 것이라는 말에 발끈하여 자신은 자유의지적인 존재라고 열변을 토한다. 강남의 아파트 숲을 한번 둘러보자. 벌집처럼 가로세로 정확하게 구획된 폐쇄된 공간속으로 사람들은 정말 “자신의 의지”로 들어간다. 너는 803호, 나는 308호. 심지어 사람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 대신, 아파트의 동호수로 지칭하는데 이르면, 진정 아파트에서의 삶이 누구를 위한 삶인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명백한 사실인데, 그걸 이렇게 집단적으로 부정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문화적 최면이고, 제도적 기만이며, 진정한 혹세무민의 사술과 같은 것이 아닐까? 

     최소한 명리학이 단순한 운명론 같은 것이라고 치부하기 전에, 우리는 자문해야 한다. 운명론이라는 비난을 가능하게 하는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이 과연 유효한 것인지. 우리는 과연 자신의 의지를 근간으로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 명리학은 그런 의미에서 자유의지를 보완해주는 관계에 있으면 있었지, 절대 인간의 개인적 의지와 자유의 영역을 침해하지 않는다. 명리학이 진보적 인문의 위치에 설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명리는 아주 분명하고 합리적인 이치가 있는 학문이다. 합리적인 만큼 그 원리를 이해하기는 쉽지만 실제로 체득하기는 어렵다. 명리는 과학인가 신비인가? 상상력은 과학에 가까운가 신비에 가까운가? 사주정설을 시작하면서 백영관은 과학과 미신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통해 우연과 필연으로 귀추되는 미신과 과학사이에 존재하는 경계의 모호함을 지적하고 있다. 


“근대과학의 발달로 인하여 삼라만상의 모든 현상을 그 원인과 결과를 과학적 방법에 의하여 구명하고, 그 원인과 결과간의 필연적 관련성을 오관의 작용에 의하여 인식할 수 없을때는, 이를 전부 미신으로 간주하여 배척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으로 되었다. 그러하 과학의 비약적 발달에 의하여 종래 통설이던 원자설이 전자설로 옮아 가고, 하이젠베르크의 원리가 공표되고 확정설로부터 불확정설로 전진함에  세계의 사조는 필연성과 우연성의 문제를 깊이 따지게 되고, 오늘날에 와서는 우연성을 보다 중요시하는 경향이 농후하게 되었다. . . 즉 우리들이 필연이라고 하는 것의 정체가 그 궁극에 있어서는 우연이라는 형태로 변하고 만다는 것을 여실히 입증해 주는 것이다. 요컨대 과학적 연구에 있어서의 ‘필연’ 이란 아주 한정된 범위 내에 있어서의 필연성에 불과하다. 고로 이 우주의 삼라만상은 과학적 개념에 있어서 우연성이 지배하고 있다고 결론을 지을 수가 있다”(사주정설). 


우연과 필연의 관계는 얼핏 미신과 과학의 관계로 투사되기 쉽지만, 사실 운명이라는 어감에서 우리는 우연보다는 필연이라는 의미를 더욱 쉽게 찾을 것이다. 백영관은 인간의 운명이 이렇듯, 현대과학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우연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지만, 사주추명을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 모든 것들이 어느 정도 필연적인 궤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이것은 우연과 필연이 서로 배제하는 이질적인 개념이라기보다, 상호 보완하는 개념이라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필연적인 것으로 인정되는 과학적 발견과 원리들이 궁극적으로 우연의 일부가 되고, 또 무작위적인 우연의 어떤 결과가 나중에 종합적인 통계로 살펴봤을 때 일종의 법칙과 패턴이 존재할 수 있다는 현대과학의 발견은 우연과 필연의 경계가 사실상 매우 모호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심심풀이 어원풀이: 이미 알면서 모른다고 생각하는 영어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