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셉에 진심인 애들이 좋더라구요
작년, [MBC 쇼 음악중심]에서 '플레이브'가 1위를 했을 때 많은 소란이 일어났다. 팬들은 환호했고 플레이브는 기뻐했는데 나머지 사람들은 충격과 공포에 빠져서는 한 마디씩 했거든. 앞으로 연예계가 어떻게 되는건지 무섭다고 하는 사람, 1위 후보군에 들었던 아이돌들 표정 굳는거 봤냐고 하는 사람, 개판이라며 그냥 웃고 마는 사람, 하지만 버츄얼 아이돌이라는 걸 제외하고 나면 노래는 좋지 않았냐고 되묻는 사람. 플레이브는2023년 3월에 데뷔한 버츄얼 아이돌이다. 그리고 방탄의 빌보드 조작같은 것도 아니고 정말로 팬들의 열성적인 지지를 받아서 온전히 자기네들의 콘서트까지 개최한 아이돌이다. 무슨 만지지도 못하는 3D 캐릭터에 야광봉까지 흔들면서 응원하는 사람이 어디있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글쎄, 일단 VFX 아티스트로 일하고 있고 지금도 거대 게임회사에서 캐릭터를 디자인하고 있는 내 누나도 야광봉을 사고 본가에 있는 겁나 큰 화면으로 콘서트까지 시간 맞춰 본 사람이다. 솔직히 버츄얼이기 이전에 나는 남돌이다보니 별 관심이 없긴 했는데, '만지지도 못하는'이 플레이브를 응원하는 팬들에게 일침을 놓기에는 어폐가 있다. 진짜 살아 숨쉬는 연예인이라고 내가 만질 수 있는건 아니잖아. 그것도 화면에서나 거의 보지.
되려 만지지도 못한다는 그 점이 버츄얼 시장에서는 제대로 먹혔다. 코로나라는 범국가적 전연병이 일궈낸 비대면의 시대와 그 사이에 초고속으로 발전한 IT 기업들의 체급. 환경과 조건이 갖춰졌는데 수요가 없을리 없다. 애정이란건 사람에게만 생겨나는게 아니고 이름 모를 꽃과 다 헤져버린 애착인형에게도 생기며, HOT의 팬들은 이제 결혼도 하고 육하도 하면서 '우혁이도 이제 좋은사람 만나야지..' 라는 아련한 시선을 보낸다. 아이돌에 대한 애정이 그 사람과 대화를 하고 사랑을 나누는 게 아닌 이상 만질 수 없다는건 딱히 큰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20년 사이에, 우리들은 너무나 많은 만화책과 애니메이션, 극장판들을 보고 자라버리지 않았나. 인식이 바뀌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나는 애초에 '아이돌'에는 관심이 없지만 종종 즐겨보는 유튜버는 있다. [향아치]라고 하는 고관대작인데 본인을 1871년생이라고 말하는 극한의 컨셉충이다. 나오는 모습만 보아도 아바타가 흉배가 새겨진 관원복을 입고 있고, 사모관대까지 쓰고 있다. 말하는 뽐새도 구독자들을 '고얀놈들'이라 부르면서 좋아요를 '흠모하기'라고 하는, 정말 컨셉에 잡아먹힌게 아닐까 싶은 유튜버다. 다만 그가 구독자들과 노는 컨텐츠들을 보고 있으면 그 생각은 오래 가지 못한다.
조선왕조실록의 번역본에서 오타를 찾지를 않나, 수능 한국사에 대한 해설을 기가막히게 잘 뽑질 않나. 팬카페에서 진행한 골동품 대회에서는 누가 조총을 가져오자 그게 국내 제작품인지 전리품인지까지 총열을보고서는 알아본다. 고증악귀라고 불릴 정도로 어디 하나 삐뚜름하게 왜곡되어있는 꼴을 못봐주다보니 잘못된 지식이 있다 싶으면 그게 어디서부터 잘못되어 내려져왔는지까지 파악해 알려준다. 살아있는 한국사 백과사전처럼 보일 정도로 세세하다보니 나중에는 깨닫는다. 컨셉에 잡아먹힌 게 아니라 얘가 컨셉을 씹어먹었다는 것을. 그 와중에도 본인은 1871년생이다보니 '고종'이란 단어를 들으면 뻔뻔하게 못알아듣는 척 하는게 웃기다.
이 외에도 국악을 하는 [이오몽], 본인이 4,000,000살 용이라고 하며 영어는 현지인에 가까울 정도로 능숙한[마레플로스], 1700살이라 주장하며 노래를 주로 하는 [아이리 칸나] 등이 모두 구독자를 10만명 넘게 보유하고 있고, 이들 말고도 수많은 버츄얼 유튜버들이 활동중이다. 5000살이 넘었다는 독일의 [샤이릴리]는 팔로워만 145만명이다. '가상'이란 말을 뜻하는 버츄얼(Virtual)이 현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은 이제 엄연한 사실이다. 한 동안 난리였던 베타버스가 다시 붐이 일어난다면 버츄얼 아바타들이 지내는 별도의 호텔 같은 것도 생겨나지 않을까 싶다. 실제 땅을 할 수 없다면 메타버스의 땅을 구입하라던 21년도의 마케팅 문구가 아직 기억나니까.
다만 그럼에도 이 수많은 구독자들을 마이너한 부류라고 치부해버리고 그들의 팬심이 어딘가 비틀린 욕망의 표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직 버츄얼이라는 단어가 멀게 느껴지나본데, 나는 버츄얼이 아닌 그 뒤에 붙는 '아바타'를 염두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적어도 온라인에서 싸이월드라도 만져봤다면 이 아바타가 뭔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거든. 싸이월드를 안해봤다고? 버디버디는 해봤겠지. 그것도 안해봤다고? 게임에서 자기 캐릭터 옷은 입혀봤겠지. 만약에 그것도 안해봤다고 하면 나는 일단 그분이 내 어머니뻘인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그럼 이렇게라도 물을 수 있겠다. 블로그 아이디라도 있을 것 아니에요 선생님.
Avatar의 어원을 보자면 매우 종교적인 의미의 산스크리트어로 '화신'을 뜻한다. 초월적인 존재가 인간의 몸으로 탄생하거나 출현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게 온라인 시대에서 나를 대체할 수 있는 어떠한 가상의 존재로 치환되었다. 게임의 캐릭터도, 싸이월드의 작은 방과 사람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존재'에 포커싱을 한다면 블로그에서 쓰는 닉네임마저 하나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다. 2008년의 '미네르바'는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으니까. 정해진 아바타가 없어도 상관없다. '페이커'라는 닉네임은 롤챔을 막론하고 이상혁 그 자체가 되었다. 사실 닉네임을 쓰기 위해서는 일단 포탈에 로그인을 해야 하는데, 포탈은 당신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적으라고 한다. ID는 Identification의 약자, 신분증이다. 다시 말해 아바타는 아무리 작은 편린이라고 하더라도 당신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실제적, 혹은 관념적인 매개체다.
4백만살을 먹은 용이나 과거사람이라고 바락바락 우기는 고관대작이나, 자기가 남궁세가의 초절정 무림고수라고 외치는 사람이나 5천살 먹은 돌고래라고 하는 애도 결국은 아바타고, 자신의 어떤 일부분적인 모습이 반영되어진 화신체다. 그런데 그 화신체들이 아무리 실제 사람같이 생기진 않았어도 예쁘고 옷도 잘입고 대화도 잘하고 능력도 좋네? 관심은 생길 수밖에 없다. '탈인간'은 이미 중요하지 않다. 에스파의 카리나는 신이잖아.
사실 버츄얼 아바타라는 존재가 본격적으로 부각된 시기는 생각보다 예전이었다. 나도 23년도에 향아치를 발견해서는 잘 보고 다녔고, 21년도엔 이미 [고세구]라는 애들이 데뷔했었으니까. 이젠 4년이 지나고 있음에도 요즘 아이돌들이 가지는 컨셉에 대해서는 환장하면서 버츄얼 유튜버들의 아바타에는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도 보이는 것만 같아 때늦은 글을 올려본다. 나는 모르겠다. 현실에서의 내 일상이 너무나도 평범해서 되려 컨셉에 진심인 애들에게 정감이 가는데, 그게 이상한건가. 그냥 저것도 애정의 한 방향인가보구나 싶던데.
어차피 푹 빠져 버린 사람들이라면 옆에서 누가 뭐라하던 신경도 안 쓰겠다만, 이 시대적 흐름이 가져다 준 변화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 없이 거부감을 내비치진 말자. 그게 심해지면 시대에 못따라가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