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질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만족할 말을 해주는 거랍니다.
CS는 감정 노동의 최전선에 있다. 실명을 밝히지 않아도 되는 인터넷 속에서 뜻모를 임시 아이디로 욕설과 비난을 하고 사라지는 사람들처럼, CS도 얼굴을 대면하지 않고 목소리만으로 대화를 이어가는 사람들이다보니 온갖 군상들이 들어오고, 거기에 의연하게 대처해야 하는 직업이다보니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웃어주니까 결혼까지 생각하는 남자들'? 아니다. 여기는 웃으면 '비웃었다'고 컴플레인을 걸고, 목소리가 밝지 않으면 화났냐고 컴플레인 걸고, 잘못한 게 없는데 사과하라 그러고, 실수한 게 없는데 배상하라 그러고, 욕해놓고 혼잣말이라고 한 뒤, 목소리가 앳되다 싶으면 호구조사하는 곳이다. 물론 이런 고객들이 많은 건 아니다. 되려 극히 드문 편이다. 고객 본인들도 챙겨야 하는 현생이 있고, 직장이 있고 일이 있을텐데 하릴없이 담당자가 굽신거리는 모습을 보겠다고 이유도 없는 꼬투리를 물고 늘어질 이유가 없다. 친구와 연락해서 안부를 물어보고 수다를 떠는 게 아닌 이상에야 오래 통화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진상의 정의야 각양각색이겠다만, 내 기준 진상은 '담당자가 책임질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까지 본인은 원하니까 책임지라고 요구하는 사람' 모두가 진상이다. 질량 보존의 법칙처럼 살면서 일정량 이상의 진상들은 마주치기 마련이다. 언제고 한번은 당신에게 찾아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CS센터는 수많은 고객들이 벅차서 짜증나는 게 아니라 그 한두명의 고객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런 진상들은 후반부에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려줄 수 있도록 하겠다.
다만 그럼에도 벌써부터 진상에 대해 논한건 전화를 하기 전까지(혹은 전화가 오기 전까지) 그 고객의 성향이 좋은지 좋지 못한지 알 수가 없다는 두려움 때문에 초보적인 상담사들이 하는 실수가 있어서다. 무조건 상냥하게 대하고, 고객이 언짢아하면 무조건 사과하고, 무조건 책임지고 처리해주겠다고 하는 마인드. 마지 희생에 가까운 아가페를 실천하려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뜯어 말리고 싶다. 혹은 완전히 반대로 어떤 것도 책임지기 싫어가지고 뭘 물어봐도 모르겠다거나 알아봐야 한다거나 버튼 하나 누르는것도 덜덜거리는 사람이 있다. 이럴땐 복장이 터진다. 두 유형 모두 두 가지 문제가 크게 발생하는데, 첫 번째는 멀쩡한 사람마저 진상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담당하는 업무에 따라서 정말로 위험한 마인드가 될 수도 있다.
- 이렇게만 준비하면 대출 나와요?
"아니요. 죄송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확답드릴 수 없습니다 고객님."
전화를 끊자 맞은 편에서 일하는 사람이 '과니님은 그 단호한 대답을 할 수 있다는 게 부러워요'라는 소리를 들었다. 고객들의 집요한 질문에 난처해진 적이 몇번 있었던 동료라서 무슨 마음으로 내게 그렇게 대답하는지는 이해했지만, 그게 단호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하는걸 어려워하면 일은 힘들어진다.
보증금 대출 CS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내게 고객들은 '말해주는 조건만 충족되면 대출이 나오는지'를 물을 때가 있다. 생각보다 잦다. 하지만 대출이 거절될 수 있는 사유는 한두가지가 아니다. 임대인의 문제로, 혹은 고객의 문제로, 또는 서류상 문제가 없어서 대출이 다 승인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잔금일이 도래하기 전에 발생한 임대인의 문제로. 하물며 대출 실행을 하기 전에 고객이 다른 신용대출을 받아버려서 신용점수가 급격하게 변동되어 대출이 중단되기도 한다. 대출이 정상적으로 실행되기 직전까지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에 내가 근무하는 센터는 '대출 가능'에 대한 어떠한 확정적인 답변도 할 수 없다. 그리고 확답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책임지겠단 소리 또한 하지 않는다. 책임지겠다고 했다가 대출이 불가능해지면? 공중으로 분해되어버린 수천만원의 계약금을 보상해줄 수는 있고?
이커머스 고객센터라면 이 워딩이 달라질 수 있다. 상품을 주문했는데 불량이다. 신선식품을 주문했는데 상했다. 교환, 반품, 환불 등의 문제에 대해서 이커버스 담당자들은 경우에 따라 '책임지고 처리해드리겠습니다'라는 대답을 한다. 이 또한 이상한 게 아니다. 쿠팡, 지마켓, 11번가, SSG 등은 '온라인 네트워크를 통해 상품과 서비스를 사고 파는 것'을 중개해주는 이커머스 사이트다. 다시 말해 상품에 어떠한 문제가 있다면 그건 해당 상품을 판매하고 수익을 거둬들인 판매자에게 요구해야 하는 문제가 맞고, 해당 거래플랫폼을 운영하는 이커머스의 입장에서는 고객의 환불이나 반품, 교환등의 문제가 정당한 요구사항이라면 당연히 처리해야 하는 업무가 된다. 고객의 과실로 상품이 불량이 오는게 아니며, 그렇다고 이커머스 플랫폼의 과실로 상품에 하자가 생기는게 아닌 이상 담당자들이 해야 하는 업무 처리를 하는데 있어서 책임을 져야 하는 부분이 맞으니까.
다시 말해 본인의 맡은 바 업무가 어디까지인지를 잘 인식해야 한다. 대출 서류심사를 담당하는 내가 고객이 원한다고 '네! 알려드린 부분만 보완해주신다면 책임지고 대출 받게 해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하면 대형사고고, 이커머스 고객센터 담당 직원이 판매자가 반품 불가라고 명시해놓은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뇨 고객님 그건 죄송하지만 저희가 책임져드릴 수 있는게 아닙니다'라고 하면 대형사고다.
고객의 요구에 수락과 거절이 중요한게 아니다. 본인이 책임질 수 있는 범위에 대해서 명확하게 파악한 뒤, 선을 그어놓아야 고객은 본인이 요구하는 사항이 해당 담당자에게선 얻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안다. 본인이 책임질 수 있는 부분도 아닌데 다 해주려는 듯이 답변하다가 이리저리 끌려가놓고 고객을 진상 취급하면 그것 또한 업무능력 부족이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정당한 요구를 함에도 불구하고 뭐 하나도 제대로 책임져 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으면 고객은 통화하면서 불만만 더 커져가는데, 이를 진상으로 생각한다면 심히 유감이다.
다만 단호하다는 게 본인의 대답이 단답형이여야 하는건 아니라는 걸 기억하자. 고객이 '이렇게 하면 대출 나와요?'라고 묻는데 '아니요.'라고만 대답하면 고객의 상태는 '그럼 나한테 왜 이렇게 하라고 한 건데...?'가 된다. 이커머스에서도 '상품이 불량인데 반품해주세요'라고 하는데 '네'라고만 말하면 그래서 반품 담당 기사가 언제 올 건지, 상품을 언제 내놔야 하는지 말도 안해주는 거니 화딱지가 안날 리가 없다.
"아니요. 고객님께서 당행에 제출해주신 서류는 모두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여 정상적으로 심사는 진행중입니다. 다만 주택금융공사나 권리조사기관에서 심사 진행이 불가능한 사유가 나올 수도 있고, 정상적으로 약정 하셔도 추후에 권리침해나 신용상 변동 등으로 인해 대출 실행이 중단될 수도 있는 점은 유의 부탁드리겠습니다. 혹여라도 심사 진행중 특이사항 발견되면 지체없이 재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고객님. 반품하시려는 물품이 2월 14일날 주문해주신 OOO가 맞으실까요? 확인 감사합니다. 현재 반품 접수를 해드렸고 담당 기사가 내일 오후 11시 전까지는 방문할 예정입니다. 받으신 구성품들은 모두 박스에 다시 넣어주시고, 기사가 반품물품인지 확인할 수 있도록 박스에 '반품'이라는 문구 기재한 뒤 현관 앞에 놓아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무사히 환불처리될 때까지 책임지고 살펴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같은 부서의 상담사 중에도 다정한 상담사가 있고 사무적인 상담사가 있다. 누가 더 점수가 높을까? 개인적으로 판단하건데 다정함과 사무적인 것은 고객과 성향이 맞아 떨어질 때 시너지가 나던지 불협화음이 나던지 정도의 차이가 있지, 생각보다 만족도의 점수에는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위의 답변들을 보자. 하나는 전월세보증금대출 관련하여 내가 고객에게 답변한 내용이고, 또 하나는 내가 이커머스 담당자에게 반품을 요청하자 안내받은 사항이다.
'대출이 나올까?'라는 질문에 '서류는 모두 통과되었고 본심사는 나도 잘 모르겠네. 혹시 문제 있으면 바로 알려줄게.'라는 대답을 했는데 더이상 궁금한 사항이 있을까? '반품 좀 해줄래?' 라고 물었더니 '반품 원하는게 이게 맞아? 기사가 이때까지는 방문해서 상품 가져갈거야. 표시해서 문앞에만 내놔주면 알아서 해줄게'라고 대답한 담당자에게 나는 더이상 어떤 것도 궁금하지 않았다. 대답에 노골적인 비아냥의 톤이 들어가있지 않다면야 담당자의 스탠스보단 결국은 내용이 중요하다.
"왜 여기는 그렇게 안 해줘요?"
"죄송합니다. 당행 규정상 고객님이 말씀하시는 부분을 반영해드리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어 타행 쪽을 알아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왜, 그 동아시아 역사책에서 나라의 흥망성쇠를 논하다 보면 항상 나오는 말들이 그런 것 아닌가. 황제나 왕이 그 아래에 있는 환관, 내시, 시종 등의 아첨과 아부의 말에 눈 감고 귀 막았다가 나라를 말아먹었다. 감언이설에 속아 큰 낭패를 보았다. 아랫것이 간드러지는 말로 비위를 맞춰주고 기분을 살피면서 권세를 등에 졌다. 이런 이야기들은 보통 간신배들을 두고 나오는 말 아니었나. 그런데 고객이 나타났다고 해서 우리가 반드시 비위를 맞춰야 한다? 왜? 간신히 비위를 맞춰 놓았는데 나중가서 보니 고객이 원하는건 하나도 해결되어있지 않았다면? 궁궐에 피바람 불듯이 수화기 너머에서도 진노한 왕이 외칠지 모른다. "상급자 어디있어!"
다만 충신은 깔끔하다. 말은 일단 똑바로 하고 본다. 자신의 상급자가 정신 똑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그 말이 합리적인지 비합리적인지는 알 테니까. 바른 말을 하는게 고까운 사람이라면 본인이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사람을 부르던지, 자기가 알아서 찾아 갈 것이다.
CS센터의 '고운 말'은 '바른 말'과 같다. 고객이 자기가 받고 있는 서비스에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어서 기분이 나빴다고 한다면야 당연히 죄송하다는 말을 할 수 있다. 내가 책임져야 하는 업무의 범주 내라면 '책임지고 최대한 빠르게 처리를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게 당연하다. 나로 인해서 고객이 더 불편해졌다면 '번거롭게 해드린점 정말로 죄송합니다 고객님'이라고 말해야 하는게 당연한거고, '고객님의 불안함은 저 또한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조금만 기다려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라고 양해를 구할 수도 있다.
다만 책임 질 수 없는 부분이라면 '그 부분에 대해선 OOO쪽으로 문의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라던지, '그 부분은 저희가 책임져드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를 명확하게 해야한다. '해당 사항에 대해서는 확답드릴 수 없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개인적으로 판단해드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닌 것 같습니다' 등. 내가 모르는거 모른다고 대답하는건데 그게 잘못은 아니잖아? 일부 악질적인 고객들은 내 입에서 일부러 '죄송합니다'라는 대답을 나오게 해서 책임지게 하려고 억지를 부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때도 본인의 업무를 생각하고, 사과를 할 수 있는 범위도 생각하면, 능수능란하게 답변할 수 있는 것이다.
"고객님. 제가 고객님께 죄송하다고 말씀드린 부분은 고객님께서 필요하신 게 무엇인지는 이해했으나 규정상 해드릴 수 없는 점에 대한 사과이며, 말씀하시는 부분에 대해서는 당행이 책임질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에 고객님에게 직접적으로 보상을 해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말은 바로 하자. 당연한 말들을 똑바로 말했다면, 혹여 재수없다는 소리는 들을 수 있어도 거짓말쟁이라는 소리는 듣지 않을 수 있다. 상대방이 기분나쁘지 않게 말하는 것에는 어느 정도 숙달된 스킬이 필요하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천천히 더 알려줄 생각이다. 고객님의 만족도 때문에, CSI 점수 때문에 불안해서 무조건적인 수용이나 근거 없는 회피를 한다면 어느날 고객 만족도는 높은데 오안내로 인한 사고가 날 수 있다는 것을 꼭 명심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