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는 가고싶지만 공부는 하기 싫다는 소리를 왜 제게..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설명할 때면 나는 그 개념부터 설명하는 편이다. 그렇기에 시작하는 글에서 CS가 무엇인지부터 상세히 설명한 거니까. 어떠한 단어들은 그 안에 내포되어있는 의미들이 방대해서 일단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서 정확한 방향성을 제시하려면 그에 걸맞는 관념을 어떻게든 언어로 표현해서 전달해야 한다. 관념은 사랑, 우정, 정의, 추억 등만을 뜻하는게 아니고 무역, 경영, CS, 회계, 중개 등의 단어들도 그 안에서 수도 없이 많은 세분화를 거치게 된다. 장님이 코끼리를 두고서 한 명은 코를 만지고, 한 명은 다리를 만지면서 설명하는 것도 결국은 본인들이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말하게 된다는 거니까.
그런데 정말 A는 A다- 라고밖에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돈. 돈은 돈이지. 사람. 사람은 사람이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고 펜은 펜이고 지우개는 지우개고, 나는 나인데 뭐 얼마나 복잡한 설명이 더 필요하다고. 그냥 눈으로 보면 답 나오잖아? 그리고 이렇게 '가는 가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 중 하나가 CS에도 있다. [매뉴얼]이다.
매뉴얼이 뭐냐니. 매뉴얼은 매뉴얼이다. 그걸 얼마나 더 풀어서 설명해야 하는건지 모르겠다. 굳이 직역하라면 '사용 설명서'다. 그럼 더이상 제목에 대해서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아래 있는 내용을 읽으면 되는 거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업무에서 쓰이는 매뉴얼들을 보여주면 '이게 뭐에요?'라고 물어보는 경우가 있다. 처음에는 대답을 망설였고, 지금은 그냥 아무 생각없이 대답한다. '메뉴얼이요.', '이게 다요?', '네~' 그럼 다섯 중 하나는 꼭 이 소리를 한다. '이걸 다 알아야 한다는 말이에요?' 개인적으로 굉장히 무례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다.
손님이 상품을 이용했다. 다만 본인이 어떻게 해야 잘 이용하는 것인지를 몰라서 담당자에게 문의를 했다 치자. 담당자는 그 문의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주는 게 업무인 사람이다. 모르면 뭐. 알아야지. 잘 기억이 나지 않으면? 찾아서 다시 연락드린다고라도 해야지. 뭔갈 물어보는데 '어...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고객님'이라고 말하게 되면 고객은 뭐라고 생각할까? '아 여기도 모르는구나! 그럼 뭐 아는 사람이 없겠네! 더이상 궁금해하지 말아야지!'라고 할까, '이 담당자는 뭐 아는게 없어? 다른 담장자 없나?'라고 생각할까.
매뉴얼은 매뉴얼이다. 지키라고 만들어져있으니 지켜야 한다. 숙지하라고 써 놓은 것이니 숙지하면 된다. 물론 당신이 어딘가의 포탈에서 회원가입을 할 때, 약관 동의와 관련해서 온갖 문서를 하나하나 다 읽어보고, 법리적 검토를 따져보고 [예] 버튼을 누르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적어도 그 포탈의 담당자라면 뭔가 물어봤을 때 즉각즉각 답이 나와야 한다. 처음부터 잘 할 수는 없다는 거야 안다. 그럼 "제가 확인해보고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고객님."이더라도 말하고 움직여야 한다. 모른다고 말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으면, 수능 시험은 뭐 백지로 내면 서울대라도 들어가게?
그럼에도 매뉴얼에 대해서 묻는다면 나는 위와 같이 말해야겠다. 메뉴얼은 선행적으로 만들어지는 부분과 후행적으로 만들어지는 부분이 있다. 선행은 상품을 출시하기 전 해당 상품에 대한 가장 기초적이면서 필수적으로 알아야만 하는 사항들과 관련하여 제시된다. 상품을 이용할 수 있는 요건, 제한사항, 필요사항 등. 이커머스 등에서 판매되는 실물 상품이라면 제품의 규격과 재질, 용량 등의 사항들이 명시될거고, 나와 같이 여신상품에 대해서 말하는 거라면 대출 기간, 연 금리, 상환 방식과 기한이익상실요건 등과 관련된 유의사항 등이 명시될 거다.
후행적인 것은 해당 상품이 출시되고 나서부터 벌어지는 예상치 못한 케이스들을 모아 다시 메뉴얼로 만든 후, 동일한 케이스가 발생했을 때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경우를 말한다. 고객이 반품을 신청했고 기사는 물품을 회수하러 갔는데 현관에 내놓은 상품이 없어졌다면? 제품에 하자가 있다면서 민원을 제기했는데 소비자의 상품을 보니 그게 정말 제품의 기계적인 결함인지, 아니면 사용자의 부주의함으로 인해 발생한 고장인지를 빠르게 판단하기가 어렵다면? 임대차계약서상 임대인이 법인인데 비영리법인인지라 법인인감증명서 발급이 어렵다고 한다면? 기간연장을 신청한 고객의 임대인이 사망을 했는데 자녀는 세명이고, 임대인의 사망신고서는 나왔지만 아직 재산에 대한 상속은 이루어지기 전이라면?
그래서 담당자의 매뉴얼은 선행적으로 만들어지고 나서, 계속해서 변경된다. 그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하기도, 정부정책에 따라 변하기도, 혹은 회사에서 자체적으로 내규를 개편하면서 발생하게 되는 변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업은 그때마다 상황에 맞게, 담당자가 올바르게 고객에게 응대할 수 있도록 매뉴얼을 수정하고 고치고 업데이트를 한다. 그걸 제대로 숙지를 안하고서 본인이 높은 업무능력을 가지고 있는 CS사원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면, 부디 부탁이건데 그거 자의식 과잉이라는 걸 자각해줬으면 싶다.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세상이 나를 모질게 대한다고 생각한다면 본인이 어딘가에서 잘못은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곰곰히 생각해보자.
나 또한 성격적으로 세심한 사람이 되지 못해서 2%씩을 놓칠 때가 잦다. 고객에게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 한번에 다 설명해주지 못해서 다시 전화를 걸게 된다던지, 혹은 서류가 다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필수사항 한 가지가 누락되었다던지 해서 발생하게 되는 문제들이 내게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빠르게 업무에 적응할 수 있었던 이유를 꼽자면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자각이다. 내가 세심하지 않다는 걸 내 스스로 인정한다는 거다. 내가 나를 이해하는 것과 남이 나를 이해해주길 바라는 것은 천지차이고, 나는 나의 부주의로 일으킨 실수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이해해주기'를 바란 적이 없다. 잘못은 잘못이고, 반복되면 창피해서 고개도 못 든다. 자존심도 없냐고? 자존심이 내 월급과 인센을 지켜주는게 아닌데 내가 뭐하러 자존심을 부려야 하는건가 싶다. 내가 나 잘못한거 알아서 스스로 반성하고 있는게 왜 자존심이랑 관련되는건지도 모르겠다. 문제 풀어놓고 답이 틀리니까 '아 답안지에 문제가 있네'라고 하면서 끝까지 오답노트 안만드는거랑 무슨 차이인가 싶고.
두 번째는 기록이다. 처음 업무를 시작할 때 나는 고객님에게 어떻게 말을 할 지, 어떤 규정에 대해서 어떻게 안내하면 보다 고객이 알아듣기 쉬울지를 계속해서 메모장에다가 스크립트로 썼고, 대출을 신청하는 고객유형을 매뉴얼과 매치시켜서 저장해놓았다. 그리곤 그와 유사한 케이스의 고객이 들어오면 바로 이전 기록을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이건 지난한 작업이라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다 보니 밥 먹는 시간까지 아껴가면서 일을 해도 시간이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 점심시간이 되면 비요뜨 하나만 먹고 나서 의자에 기댄 채로 쪽잠을 잤다가 퇴근할 때까지 다시 핸드폰 한번 안 키고 메뉴얼을 보면서 일했다. 단순한 고객 하나 통화 나가는데만 기본으로 20분이 걸렸다.
이 모든 노동은 나중에 내 업무 처리능력을 비약적으로 늘려놓아서 웬만한 특이케이스가 오지 않는 이상에야 힘들다는 생각도 없이 일을 처리하게 만들어놓았다. 고객 리스트가 들어가있던 엑셀 파일과 내가 직접 스크립트를 짰던 메모장이 나의 경력이자 포트폴리오였다. 내가 응대한 특이케이스가 교육자료로 쓰일 때도 있었고, 매뉴얼상 참고해야 하는 사항으로 추가될 때도 있었다. 다시 말해 본인이 메뉴얼과 가까워질 수록 업무 능력은 오른다.
노동은 노동이다. 다만 노동을 경력으로 치환시키려 한다면 본인이 지금 하는 노동이 무엇을 위한 노동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매뉴얼을 몰라서 헤메다 보니 발생한 감정적인 스트레스인가? 아니면 진짜 어렵고 복잡한 케이스로 고객이 들어와서 매뉴얼상에도 참고할 만한 게 없다보니 직접 유관부서에 문의해가며 알아봐야 하는 케이스인가? 생각보다 후자는 별로 없고, 전자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경력은 그 '노동'이라고 느낀 것을 어떤 방향으로 쌓아 나가야 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노력한다고 해서 성공하지 않는다. 성실함이 경제적 여유를 가져다주는 게 아니다. 솔직히 스무살 좀 넘고 나면 그 정도는 알지 않나.
다만 그 노력과 성실함이 어디에 방향성을 두고 있는지에 따라 결과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알 거라고 믿고,
당신이 보고 있는 그 수많은 메뉴얼은, 적어도 '일 잘하는 사원'이 되기 위한 방향성을 명확하게 잡아주고 있따는 것을 명심해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