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선생, 석규(가명) 또 왔다. 제발 하루에 한 번만 오라 캐라.”
옆자리 선배 교사가 짓궂게 놀려 댄다.
복도 쪽 창가에서 턱을 괴고 빤히 바라보는 두 눈동자의 주인공은 석규다.
석규는 2학년으로 내가 수업 들어가는 반의 지능과 학습능력이 부족한 아이다. 당시는 특수학급이 따로 없었다. 특수교육을 전문적으로 하는 학교도 많지 않았고 그나마 주로 시 외곽지역에 있었다. 그래서 어느 학교든지 석규와 비슷한 아이가 몇 명은 있었다. 특수교육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의 유형은 다양하고 정도의 차이도 심했다. 석규는 개중에 나은 편에 속했다. 학습능력은 다소 부족하지만 의사표현도 분명하고 글도 쓸 수 있었다. 성격도 온순하다. 게다가 나를 좋아하는 걸로 봐선 사람 보는 눈도 정확하다.
나는 차도녀 스타일이다. (혹시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다) 겉보기완 다르게 개인적으로 아이들을 만나면 다정한 편이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아이들에게 곧잘 말이나 장난을 건다. 평소에 한 성깔 하던 이가 의외로 조금만 살갑게 대해도 아이들은 훅 넘어온다. 반전매력이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나라는 인간이 계획적으로 친절한 멘트 날릴 만큼 머리 굴릴 주제는 못된다.
학기 초. 석규네 반 수업 시간이었다. 아이는 교과서 한 페이지를 베껴 쓰고 있었다. 뜻도 모른 채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연필로 꾹꾹 눌러썼다. 그것도 끝나면 심심해서 주리를 틀고 앉아 있던 석규에게 읽고 싶은 동화책을 가져오거나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 다른 아이들이 과제를 해결할 동안 동화책 내용을 물어보거나 그림을 함께 그리며 말을 붙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석규가 나를 따랐다. 나중엔 부담스러울 만치 쫓아다녔다.
석규반은 복도 끝이다. 아침 조회시간부터 우리 반 복도에서 날 쳐다보고 있다. 쉬는 시간이면 어느새 교무실 복도에 서 있다. 걸핏하면 교무실로 불쑥 들어와 나를 담임처럼 대한다.
"내일 몇시까지 와요?"
“내일 뭘 가져와요?”하고 묻는다.
우리 반 아이들은 나를 놀려 먹고 짓궂은 동료 선생님들도 농을 한다. 석규 담임은 아예 우리 반으로 데려가라 했다. 석규와 하루에 세 번만 보러 오기로 손가락 걸며 약속을 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시험기간이었다. OMR카드의 앞면에는 객관식 답을 표기하고 뒷면에는 간단한 서술형이나 단답형의 답을 적게 되어 있었다. 석규의 모든 과목 카드 뒷면에는 커다란 글씨로 석규 사랑 000이라고 적혀 있었다.
내 이름 뒤에 선생님이란 말도 없었다. 이 녀석 아무리 내가 좋기로서니 이렇게 만천하에 광고하다니. 녀석의 눈이 높은 것은 인정하지만 참으로 민망한 노릇이었다. 일 년 내내 답안지에 그렇게 적다 보니 석규를 모르던 선생님들도 시험감독을 들어가 그 꼴을 보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해가 바뀌어 석규는 3학년이 되고 나는 2학년 수업을 맡았다. 3월 초까지 날 보러 오던 석규의 발길이 뜸해지자 옆자리 선생님들도 궁금해했다. 나역시 귀찮으리 만치 찾아오던 녀석이 보이지 않으니 궁금하고 걱정도 되었다. 올해 전근 온 석규의 담임도 잘 모르는 눈치다. 영문을 모른 채 3월의 둘째 주가 지났다.
어느 날. 새로 부임한 음악 선생이 생글거리며 다가왔다. 이제 갓 발령받은 새내기 여선생으로 웃는 모습이 참 예쁘다. 고향이 중부 지방이라 그런지 말투도 싹싹하고 목소리는 나긋나긋해 나처럼 욕을 해대지도 않을 것 같았다.
이전에 내게 그랬던 것처럼 이번엔 틈만 나면 4층 음악실 복도에 붙어 산단다. 그녀가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았지만 내가 아는 석규에 대한 모든 정보를 넘겨주었다. 한데 뭐지 이 기분은. 한순간 연적에게 당한 것도 같고,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것 같기도 하다. 분명 앓던 이가 빠진 것 같은데 시원하지만은 않다.
물론 음악 선생에게 나의 추종자를 잃은 보복 따윈 하지 않았다. 당시 학교에는 나를 포함한 젊은 여선생이 의기투합하여 4인방을 조직했다. 4인방은 조직의 쓴맛을 보여 주며 그녀를 포섭했고 곧 5인방으로 조직이 개편됐다.
그 해 내내 석규의 답안지 뒷면에는 석규 사랑 YYY가 적혀 있었다.
석규는 나의 다정함에 이끌려 일 년 동안 나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다정함은 미모를 이길 수 없었다.
이놈의 외모 지상주의!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석규의 사랑은 일년짜리 시한부였다.
* 졸업 후 학교를 찾은 석규는 나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ㅠㅠ
대문사진: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