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보다 잦은 모임으로 뱃살이 두둑해졌다. 아래위로 울룩불룩 겹쳐진 세 겹의 주름아래 무등산 수박이 자리 잡고 있다. 앉아 있으려니 불편해서 기대고 싶고 기대니 눕고 싶다. 누우니 잠이 온다. 뱃살은 매사를 귀찮게 만드는 탁월한 재주가 있다. 굳이 불어난 뱃살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체중계에 몸을 싣는다. 숫자는 확실한 증거로 나를 압박한다. 좋아, 오늘부터 다이어트다.
그 순간 냉장고 속 봄향기 그윽한 딸기가 왔다 갔다 한다. 제주도 여행 간 조카가 보내온 상큼한 천혜향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래, 맛만 보자. 대신 저녁 후식으로 야금야금 먹어대던 소라깡이며 고소한 두부과자는 당분간 금지다. 밥은 반 공기만 먹어야지.
동네 매화나무에 연분홍 꽃망울이 폭죽처럼 터진다. 여느 해보다 일주일이상 빠르다.
매화는 봄의 전령사로 알려진 대표적인 봄꽃이다. 경남 양산에 알려진 매화마을이 있다. 사는 곳과 가깝지만 여태껏 한 번도 가 보지 못했다. 해마다 벼르기만 했던 원동 매화마을을 찾았다. 3월 11일~12일 이틀간은 매화 축제기간이다. 코로나19로 미뤘던 행사가 4년 만에 열렸다. 사람들로 붐빌 것 같아 축제 기간은 피했다. 3월 25일까지 개방한다길래 평일 낮시간에 느긋하게 찾았다.
구불구불한 오르막길을 따라 산중도로를 한참 달리다 보니 갓길엔 벌써 주차된 차들이 즐비하다. 주차장은 물론 갓길에도 빈틈이 없다. 몇 바퀴를 돌아도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평일인데 웬 사람이 이렇게나 많담’하고 투덜대며 포기할까 하다 맞은편에서 겨우 한 자리를 찾았다.
도로를 건너니 강변 쪽으로 마을의 경치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예년보다 높은 기온에 꽃이 일찍 피어 절정의 아름다움을 볼 순 없었다. 원동의 매화는 대부분 흰색에 가까운 연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매화는 하얀 팝콘이 나무에 주렁주렁 열린 것 같기도 하고 눈꽃송이를 매단 것처럼도 보였다. 연분홍 사이로 보이는 홍매화의 붉음은 고혹적인 매력을 뽐낸다. 규모가 커지않아 오히려 아기자기하게 느껴지는 매화농원과 낙동강. 그리고 강변을 따라 이어진 철길은 낭만 그 자체였다.
어우러진 풍광이 한 폭의 수채화가 따로 없다. 살랑거리는 바람결에 휘날리는 매화 꽃잎이 살포시 머리 위에 앉는다. 아름다운 배경을 뒤로하고 사진을 찍는 내가 이별을 앞둔 비련의 여주인공 같다. 선글라스의 마법이다. 강변을 따라 달리는 기차 시간에 맞춰 찍은 사진은 인생 사진이 된다고 했다. 아쉽게도 일정이 있어 기차가 오는 것은 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마을 곳곳에서 고소한 전냄새와 고기 냄새가 풍긴다. 원동면은 미나리 산지로도 유명하다. 봄이면 미나리 삼겹살을 파는 식당은 사람들로 줄을 잇는다. 향긋한 미나리 전과 막걸리가 유혹한다. 멋과 맛에 취해 연신 고기를 구워대는 사람들의 흥겨움도 보인다. 처음부터 먹거리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기웃대며 주차장을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한 여성이 바로 앞에서 오토바이주인인 듯한 이에게 미나리를 건네받고 있었다. 마트에서 파는 것보다 묶음이 아주 실했다. 계산을 끝내는 남자에게 한 단에 얼마냐고 물었다. 만 이천 원.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덜렁 사버렸다. 그는 검은 천을 뒤집어씌운 오토바이 뒷좌석 바구니에서 싱싱한 미나리 한 단을 꺼내 준다. 뭔가를 두고 온 것처럼 허전했던 발걸음이 이제야 가볍다. 남편은 코를 킁킁 대더니 미나리향이 별로 안 난다며 잘못 산 거 아니냐고 구시렁댄다.
속으로 '먹기만 해 봐라' 싶었다.
꽃씨와 비료를 사러 나간 김에 마트에 들렀다. 대패 삼겹살을 샀다. 어제 먹지 못했던 미나리 삼겹살을 기어코 먹을 참이다. 원동 미나리는 영남 알프스라고 불리는 지역의 배내골 지하수로 키운다고 한다. 화학비료나 농약을 사용하지 않은 청정한 식재료이다. 예전엔 논에서 키워 미나리 잎사귀에 거머리가 붙어 있기도 했다. 혹시 하는 생각에 10분 정도 식초 물에 담가 두었다.
깨끗이 헹궈낸 미나리 한 줄기를 생으로 입에 넣었다. 맛있다. 연하고 아삭한 식감에 미나리 특유의 향이 입안에 퍼진다. 살 때는 진하지 않던 향이 밑동을 제거해서 그런지 향긋함이 확 올라온다. ‘잘 샀네.’ 속으로 씩 웃었다.
일회용 가스버너에 주물 팬을 얹고 충분히 달궈지는 사이 상차림을 한다. 냉동 대패 삼겹살과 미나리 한 움큼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팬 위에 놓는다. 금세 '치익'하고 맛있는 소리를 낸다. 침이 꼴깍 넘어간다. 고기와 미나리가 익기를 기다리며 눈을 희번덕거리는 내게 “당신 다이어트한다지 않았어?” 기어코 한 마디를 내뱉는다. 밉상이라는 말은 이런 때 쓰는 말이렷다. 못 들은 채 하며 날름 앞접시에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갖다 놓는다. 넓적한 고기 위에 숨 죽은 미나리 한 젓가락 올리고 갈치속젓을 콕 찍어 돌돌 말아 입에 넣는다. 입안에서 퍼지는 삼겹살의 고소함과 향긋한 미나리향이 맛의 천국이다.
그래, 이 맛이지. 미나리 삼겹살을 앞에 두고 참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다이어트 따윈
가라. 갓 담근 파김치까지 곁들이니 먹는 즐거움이 배가 된다. 미나리를 좋아하는 남편은 입이 미어터지게 불룩거리며 연신 맛있다고 난리다.
“당신은 역시 대단해. 탁월한 선택이야.”
그 와중에 추켜세우는 것도 잊지 않는다.
언제는 잘못 샀다며.
어느새 팬은 바닥을 보인다.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야’라는 말로 굳이 자신을 속일 필요 없다. 이왕 먹을 거 죄책감에 빠질 거 있나.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는데.
자리에서 일어서자 봉긋해진 배에 눈이 간다. 움직여야겠다. 앞치마끈을 질끈 묶으며 200그램 정도는 빠지지 않을까 뻔뻔한 기대를 한다. 손은 어느새 식탁 위의 그릇을 주섬주섬 치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