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여백 앞에서 _ 쓰이지 않은 문장을 기다리며

절정과 귀환

by 딸리아

서울행 비행기 표를 사야 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다른 옵션은 없을까. 떠나지 않을 핑곗거리는 없을까.

나는 지금,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다.


한강의 『흰』에서 본 문장이 떠올랐다.

“우리가 읽고 쓰는 모든 문장들이 종이의 ‘흰’ 여백 안으로 삼켜지고 사라지고 다시 쓰이기를 강요받는 것과도 같다.”


지금 나는, 그 흰 여백 안에 있다.

떠나기 전의 공백, 도착하지 않은 문장.

이곳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는 없지만, 떠날 용기 또한 모이지 않는다.

여백은 아무것도 없기에 두렵지만,

동시에 모든 것이 가능하기에 더 두렵다.

그래서일까. 조금 더 이 흰 공간에 머물고 싶다.

다시 쓸 용기를 기다린다.


비행기 안에서 나는 여러 번 움츠러들었다.

“당신 가방, 대체 어디 있었던 거죠?”

다그치듯 묻던 승무원의 목소리는 창 밖의 어두운 대서양만큼 차가웠다.

치킨을 알아듣지 못했고, 담요를 부탁했지만 대답조차 돌아오지 않았다.

그 몇 번의 작은 무시에, 나는 작아졌고 피곤해졌다.

왜 굳이 이 고생을 감수하며 이곳에 있는 걸까.

내가 떠나온 곳, 그 익숙한 집은 왜 뒤로 남겨졌을까.


뉴욕으로 가는 기내에서, 나는 다시 한강의 『흰』을 꺼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작품의 해설을 반복해서 읽고 있었다.

소설의 결보다 느리게, 해석의 결을 따라가며

내가 느낀 것과 남의 해석 사이의 간극을 더듬었다.


하이데거.

대학원 시절, 교수님의 문장 속에서 맴돌던 철학자의 이름.

‘존재와 시간’,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삶의 자리에 대한 질문은, 그 울림은 여전히 남아 있다.


바스티유.

몇 년 전 읽은 미술사 책 속에서 본 철학자의 이름.

폭력의 역사와 예술의 상징, 자유라는 이름의 아이러니.

그 단어들이 내 안에서 뒤섞이며 『흰』의 세계를 떠다닌다.


‘흰’은 다른 색을 가능케 하는 바탕이자,

스스로는 색을 낼 수 없는 ‘잡것’이라 했다.

그 표현에 오래 머물렀다.


흰색이란,

모두를 품고도 드러나지 않는 어떤 가능성이다.


나는 여전히 쓰이지 않은 문장을 바라보고 있다,

일상으로의 귀환을 강요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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