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가 지나고 봄방학이 시작될 무렵이면, 두둑해진 세뱃돈을 들고 친구들과 약속을 잡았다. 그때는 지금처럼 대형 쇼핑몰이나 온라인 쇼핑이 없던 시절, 백화점은 우리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형형색색의 상품들이 가득한 매장과 반짝이는 쇼윈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내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렜던 그 시절이 있었다.
설날이 지나고 봄방학식을 마친 어느 날, 우리는 약속한 대로 신촌에서 만났다. 정아, 미란, 그리고 나.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이어진 우정은 각자 다른 중학교에 배정받은 후에도 계속되었다. 우리의 연례행사 중 하나인, '공책 사러 백화점 가기'를 위해 모인 것이다.
"너네, 얼마 가져왔어? 나는 9천 원!"
"나는 만천 원이야."
"난 7천 원..."
설렘 가득한 얼굴로 각자의 지갑 사정을 공개하고, 우리는 328-1번 버스에 올랐다.
1980년대의 명동은 백화점의 천국이었다. 새로나, 롯데, 미도파, 신세계 백화점이 서로 가까이 모여 있어 쇼핑하기에 이보다 좋을 수 없었다. 특히, 일 년에 딱 한 번 '공책 사기' 행사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각 백화점은 저마다의 독특한 매장 구성과 분위기를 자랑했지만, 그중에서도 롯데백화점은 단연 돋보였다.
우리는 네 곳의 백화점을 차례로 둘러본 후, 주로 롯데나 미도파에서 학용품을 샀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층마다 진열된 상품들을 구경할 때의 그 설렘이 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했으며, 친구들과 함께 있어도 불안한 두근거림이 있었다.
허리춤 높이로 가지런히 정돈된 공책들은 넓게 사각형을 이루며 진열되어 있었다. 그 위에는 무지, 줄노트, 모눈종이 등 다양한 종류의 공책들이 수십 종의 표지와 함께 줄지어 쌓여 있었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네 개 면을 천천히 돌며 한참을 고르고 골랐다.
"이거 봐, 앞표지에 강아지 있어!"
"난 이 체크무늬가 더 예쁜데..."
"필통은 어떤 걸로 할래?"
각자의 취향에 맞게 고른 학용품들은 그 자체로 보물이었다. 공책 10권에 교과서 포장지, 일기장, 필통까지... 백화점 쇼핑백을 들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올 때의 그 기분, 살면서 이 날만큼 부자였던 적이 없다.
우리는 참고서를 사기 위해 교보문고로 향했다. 나는 영어, 수학, 국어... 모두 사고 싶었지만, 가진 돈이 부족해서 영어와 국어 참고서만 구입했다.
그렇게 한 바퀴 돌고 나니 배가 고팠고, 수중엔 1,100원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짜장면을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백화점과 교보문고를 돌아다니느라 다리는 아팠지만, 마음은 뿌듯했다.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었다.
비유가 적합할지 모르겠지만, ‘오사카에 우동 먹으러 갈래?’ 같은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