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기장에는 “데모”라는 제목의 글이 두 번 있다.
한 번은 코와 눈이 따가워 견디기 힘들었던 어느 날,
또 한 번은 TV 화면 속 사람들을 바라보다 울컥했던 밤이었다.
그 시절 나는 무엇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지금 그날의 일기를 꺼내어 본다.
내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이른바 ‘데모’가 많았다.
중학교는 신촌 가까이에 있었고, 고등학교는 시청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에
수업 중에 입과 코를 틀어막는 일도 많았고,
고가를 지나는 대학생들 행렬 속에서 수많은 깃발들을 봤던 기억도 있다. 최루가스가 날아오는 것은 아닌지 손수건에 물 묻혀서 하교를 하기도 했다.
첫 번째는 중학교 2학년, 1984년 9월 어느 날이었다.
1984년은 민주화 운동의 열기가 다시 살아나던 시기였다.
1983년 12월 21일 ‘학원자율화 조치’ 후,
학생회를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다시 일어났다.
1984년에는 소위 ‘유화국면’이 조성되었고,
학생운동 진영은 유화국면을 이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유화국면의 기만성을 알리기 위해
‘학원 민주화 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여 나갔다.
1984년 8월 17일, 백태웅 등 사회과학연구회 관련 인사들이 줄줄이 체포되었다.
1984년 9월, 전국 대학에서 동시다발적 시위가 일어났다.
1984년 9월 20일, 고려대학교에서 전국 최초로 총학생회가 부활되었다.
1984. 9. 4
“오늘 몇 군데 대학에서 데모가 일어났다. 최루탄 가루가 날아와서 나하고 우리 집 주변 사람들의 재채기 소리와 눈 비비고 코 비비는 사람, 정말로 죽을 뻔했다. 도덕 선생님께서는 데모가 필요하다고 하셨다. 하지만 요즘같이 수해로 피해 입어 복구작업이 한창이고, 농촌에서는 쓰러진 벼 세우기에 여념이 없는데 이 판국에 대학교에서 데모라니 말이 되는가? 데모를 하려면 화끈하게 해서 성과가 있어야지, 시도 때도 없이 데모를 하다니.”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TV 속에서 비친 현실과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실이 너무 달랐다고 느꼈다.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데모에 화도 난 듯하다. 힘들게 공부해서 대학교에 갔으면 공부나 열심히 해야지 않나 생각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는 그 복잡한 상황을 이해할 만한 정보도, 시야도 없었기에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반응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고등학교 1학년, 1986년 5월의 어느 날,
1986년 5월 3일, 인천에서 대규모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신한민주당의 인천 개헌추진위원회 경기·인천지부 결성대회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당시 군사독재 정권은 이를 좌경용공 세력의 체제 전복 시도로 규정하고 강경 진압에 나섰다.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였다고 하고,
이는 이듬해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아마도, TV에 방영된 인천 민주화 운동을 보고, 일기장에 쓴 듯하다.
1986. 5. 4
"아무리 정권이 어떻고 저떻다 해도 사람을 저렇게 잔인하게 두들겨 패면 되나? 그 사람들이 사람인지, 아니면 먹이를 쫓듯 덤벼드는 맹수인지. 대학생들은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데모의 목적이 무엇인데, 사람을 때리고, 불을 지르고, 부수고 하는 것이 데모인가? 저들처럼 내면이 포악하고 잔인한 사람들이 있는 대학교에 가는 것이 두렵다 “
방송에는 전경(전투경찰)들이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고. 당시 대학생였던 언니가 말했다.
정부의 통제 아래 있던 언론은 시위대의 폭력성만을 부각했다.
경찰들도 본연의 치안 유지 임무는 방범대원들에게 맡기고 시위 진압에만 매달렸다.
일기장 가득히 시험과 성적으로 괴로워하며, 대학교에 갈 수 있을지 없을지 했던 나로서는,
TV에 비친 전경과 대치하는 대학생들의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던 듯하다.
1990년 이후부턴가 대학가에 데모는 거의 사라진 듯하다.
1980년 대, 중학생인 나는 대학생들의 행동을 불장난처럼 바라보았던 듯했고,
2년의 시간이 흐른 후, 고등학생인 나는 그 속에서 혼란과 불안을 감지했다.
하지만 여전히 데모에 대한 진실된 정보는 알지 못한 채, 불안만 가중되었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