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때 스마트폰이 처음 나왔다. 한 동기생이 ‘아이폰’을 가져왔고, 난생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을 보며, 100년 전 고종황제가 경복궁에서 처음 ‘전화’를 사용했다는 역사책 속의 사진 한 장이 머리를 스쳤다. 우리는 고종황제의 그때만큼이나 스마트폰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놀라움을 그치지 못했었다.
하지만, 아이폰이든 갤럭시든 나에겐 ‘그래 봤자 전화기’에 불구했다. 인터넷도 할 수 있고 지도도 볼 수 있는 ‘똑똑한 전화기’와 중학생 때부터 사용했던 64화음 휴대전화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었다. 빡빡한 생도생활에서 굳이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하거나 지도를 볼 일은 없었다.
공부와 운동, 내무생활로 가득한 생도 생활에서 전화기는 세상과 소통할 유일한 창구였다. 문자 한 통, 전화기 넘어 목소리 몇 마디가 소중했던 것이지 그까지 몇몇 게임이나 인터넷이 중요하지는 않았었다. 결국엔 재수생을 끝으로 세상에서 자취를 감춰버린 ‘나’를, 아직 살아있다고 친구들에게 알릴 수 있는 도구로서 ‘똑똑한 전화기’의 ‘전화 기능’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최전방의 시계
고성에서 시작된 군 생활은 아-주, 재-미 있고 피-곤했다. 대한민국의 가장 동북쪽 끄트머리의 해안 소초장을 맡았었는데, 그 ‘똑똑한 전화기’도 함께 최전방을 수호하게 되었다. 하지만 암석해안으로 이루어진 그곳에서 나의 전입 동기인 전화기는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했고,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늘 전파가 안 터진다는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암석 절벽 사이를 오가며 순찰을 하다 보면 전화기는 ‘시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도구가 되어버렸다. 오히려 P-96k의 우선 탐색 기능이나 초소마다 설치된 무선전화기의 벨소리 볼륨 조절 기능이 나의 스마트폰보다 더 스마트했다. 하지만, 이 녀석도 작전이 모두 끝나고 쉬는 시간에 소초 옥상에 가서 팔을 뻗으면 정처 없이 떠다니는 전파를 잡아채서 나를 ‘세상’과 연결해 주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노력으로 전화기는 늘 배터리가 고속으로 닳아 없어졌다.
어찌 됐든 24시간은 함께 했었던 건 매한가지였다. 특별히 비나 눈이 오더라도 함께였기 때문에 전화기의 화면은 습기가 들어가 얼룩덜룩해졌지만, 고성에 휴대폰 서비스센터는 없었다. 그렇게 1년이나 되는 시간 동안 나의 스마트폰은 화면이 얼룩덜룩해진 시계로서 충직하게 내 옆을 지켰다.
300, 하루에 받을 수 있는 최대 통화량
전화가 제 역할을 한 것은 1년간의 소초장 생활이 끝난 다음이었다. 전화기는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울려댔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화가 오면 받고 또 걸었다. 취사와 급식, 유류, 배차, 시설물, 보급품에 관련된 내용은 물론이고, 지원과장님이 안 계셨었기 때문에 인사분야 관련된 내용까지 아우르며 하루에도 100통이 넘는 업무 전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중위인 내가 뭘 안다고 사람들은 그렇게들 전화를 걸었다.
KCTC를 준비하던 여름날엔 정말 많은 통화를 했었다. 하루는 전화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몰려오는 두통으로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새벽부터 자기 전까지 몇 통의 전화를 주고받았는지 세어보았다. 맥주를 두어 캔 마시면서 센 통화 수는 딱 299 통이었다. 같은 방 동기와 “말도 안 된다”라며 맥주캔으로 건배를 하는 순간 그날의 300번째 전화가 울려왔고, 나는 울었다.
당시의 스마트폰은 그래도 주말이면 내비게이션이 되어 고성 이곳저곳으로 자전거 탄 나를 인도하였고, 어느새 고성의 안 가본 시골길과 등산로가 없을 정도였다. 아웃도어 애플리케이션에서 장거리 달성 자전거 배지, 목표치 달리기 배지 등 수많은 배지들을 차례로 획득했다. 해안도로를 따라 페달을 구르다 멈춰 서면 그곳은 스튜디오였고 사진을 찍으면 작품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스마트폰은 어디인지 모르는 동네에서도 척척 식당을 찾아주었고, 신나게 달릴 때는 흐름에 맞게 음악도 들려주었다. 스마트폰이 스마트한 제 역할을 다했던 ‘호시절’이었다.
5분 전화 대기 부대
시간이 지나 대위가 되었다. 남들은 한 번 내지 두 번을 하는 중대장이었지만, ‘지휘관만 하고 싶다’라던 나의 작은 소망이 현실이 되었는지 중대장 세 번에 54개월이 흘렀다. 수많은 임무와 사건들이 있었지만, 어디에서 어떤 임무를 했었는지가 기억에 남는다기보다 54개월간 내가 책임져야 할 누군가와 함께했었다는 긴장감만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때때로 그 긴장감은 상황이나 분위기로, 또는 냄새나 소리로 기억되기도 하지만 가장 선명한 것은 잠결에 들려오는 전화벨 소리로 기억되는 긴장감이었다. 바람 잘 날 없었던 54개월의 군 생활 동안의 중대장 생활은 나에게 알 수 없는 긴장감으로 기억되고 있다. 전화는 언제라도 울렸다. 밤과 낮을 가리지도 않았고 주말도 예외는 없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좋은 일보다는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나 사건·사고에 관한 것들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5분 전투 대기 부대를 하는 기분으로 지낸 시간이었다.
전화기는 늘 손에 닿아있었고, 잘 때는 머리맡에서 대기 중이었다. 생각해보면 54개월간의 습관 때문인지 아직도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아직도 매일 밤 서너 번은 깨서 핸드폰 화면에 부재중 전화는 없는지, 메시지는 없는지 확인하고 다시 자는 버릇이 생겼다. 아내는 이런 내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투로 말한다.
“어차피 전쟁 났다는 전화 아직까지 한 통도 오지 않았는데, 잘 때라도 핸드폰 좀 멀리 떨어뜨려 놓고 자면 안 돼?”
생각해보니 아내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더군다나 지난 6월을 기점으로 54개월간의 중대장 생활을 마쳤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웬만해선 자고 있는 나에게 전화가 걸려올 일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생각과 마음은 항상 같이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내 베개 옆에 전화가 놓인다.
카톡, 중댐~
2차 중대장을 하던 언제부터인가 용사들도 부대 내에서 핸드폰을 사용하게 되었다.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지만, 나는 좋았다. 부하들의 복지를 위해서는 노래방도 치킨도 좋지만, 핸드폰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용사들이 휴대폰을 사용하면서, 자기 계발과 여가의 범위도 획기적으로 늘어났다. 비록 몸은 울타리 안에 있었지만, 스마트폰을 켜는 순간 용사들은 어디에도 존재할 수 있었다.
스마트폰을 통해 용사와 부모, 친구들 간의 소통도 자유로워졌고, 용사와 간부들과의 소통도 훨씬 쉬워졌다. 언제나 화장실 한 켠을 지키던 ‘마음의 편지함’은 휴대폰의 사용과 동시에 무용지물이 되었다. 용사들은 모든 의견을 서슴없이 메신저나 SNS로 개진했다. 그들에 비해 10년이나 형이었던 나는 종종 부하들의 메시지에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다.
[꺄톡] “중댐~ 혹시 분대장 지휘활동비로 치킨 좀 시켜서 회식해도 되겠습니까~”
[꺄톡] “중댐!!! 00랑 00랑 지금 싸웁니다!!!! 00 손가락 부러진 것 같습니다!!”
[꺄톡] “저 너무 힘듭니다. 계속 안 좋은 생각만 떠오릅니다”
[꺄톡] “축구 안 하십니까~ 얼른 오십쇼~ㅋㅋ 아, 안 오셔도 좋고요”
잠깐의 당혹감을 추스르고 부하들과 소통이 시작되면 생각보다 ‘좋았다’라는 느낌으로 마무리되기도 하지만 가끔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휴가 출발한 이등병에게) “00야 집에 잘 들어갔니? 도착하면 연락 좀 달라고 했는데 아직 연락이 안 되네~”
(몇 시간 뒤)“00야, 혹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전화도 꺼져있고. 메시지 보면 전화 좀 줘~!”
(다시 얼마 뒤)“00야, 지금 어디니? 집에 도착했어?? 전화 좀 줘”
[꺄톡] (고기 사진), (PC방 사진)
‘시대가 많이 변했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얼마 전 유행했던 [90년대생이 온다]라는 책보다도 더 앞서가고 있는 곳이 군대다. 이미 군대에는 90년대생은 줄고 있고, 00년 대생들이 충원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메신저로 소통이라도 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세대 간의 차이가 벌어져 버릴 것만 같아 무섭기도 하다.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다.
코로나 시대의 필수품
세대가 바뀐 줄 알았는데, 시대도 바뀌었다. 시대가 바뀌었다는 것을 인정하려는 순간 세상이 바뀌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순식간에 모든 것을 바꿔버렸다. 우리가 알던 모든 ‘당연한 것’들은 ‘옛것’이 되었고, ‘새로운 것’이 ‘당연한 것’이 되었다. 일상적으로 누렸던 모든 호사는 불가능해졌고, 용사들이 외출 외박 간 애용하는 영화관, PC방을 포함한 다양한 편의시설들은 ‘다중이용시설’에 대한 통제 지침으로 ‘통제구역’이 되었다.
두 아들은 어린이집에 갈 수 없었고 키즈카페나 수영장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대학원 공부도 ‘올 스톱’되었다. 아내의 요가를 비롯한 모든 여가생활이 불가능해졌다. 우리 가족은 관사에 머물렀다. 나와 아내는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보며 홈트레이닝을 했고, 하고 싶은 공부는 스마트폰 강의로 대체했다. TV가 없는 우리 집에서, 아이들은 이따금 스마트폰으로 애니메이션을 보며 무료함을 달래곤 한다.
용사들은 영내에 머물렀다. 외출과 외박이 없어진 상황에서 용사들은 얼마간의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다행히 그들의 손에는 스마트폰이 쥐어져 있었다. 터치만 하면 엄마 얼굴도 볼 수 있고, 친구들과 게임을 할 수도 있었다. 여가생활이나 자기 계발도 제한된 범위 안에서 충분히 가능했다. 그렇게 스마트폰은 우리에게 코로나 시대의 필수재가 되었다.
24시간이 모자라
스마트폰 없이 하루를 보낼 수 있을까. 전화와 문자는 물론이고 은행업무, 뉴스 시청, 영어공부, 취미생활까지 모두 이 작은 기계 하나로 다 가능한 세상이고, 우리는 이 전화기와 완전히 함께하는 중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물리적 한계는 스마트폰이라는 만능 기계의 도움으로 좀 더 윤택하고 빨리지고 있다. 우리의 부족한 시간과 능력을 보조해주는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내 경우에는 스마트폰이 없었을 때, 독서나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많았고 잠도 더 충분히 잤던 것 같다. 스마트폰의 도움으로 여유가 생겼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가지고 있던 24시간도 모자라게 된 것이다. 의미도 없이 수시로 열어보는 것도 그렇고, 아마도 인간과 스마트폰이 서로를 귀속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스마트폰을 없애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어쩌면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약간은 께름칙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곤 검은 얼굴로 ‘모르쇠’ 태도를 취하고 있는 스마트폰에게 따끔하게 한 마디 한다. “배신하면 알지?” 스마트폰은 반쯤 끄덕인다. 아마도 이쯤 되면 문제가 있는 것 같다.
휴대 전화기. 우리 함께 한 24년+, 하루 24시간+, 앞으로도 그리고 그 이상으로도+.